한고조열전

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마지막 편, <여 황후와 척씨 부인>》

오토산 2020. 7. 5. 09:33



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 (140)

마지막 편, <여 황후와 척씨 부인>

여 황후는 이팔 청춘의 꽃다운 나이로

무명 청년이었던 유방과 결혼하여 한평생을 유방과 더불어 생사 고락을 같이해 왔었다.

유방이 천하를 얻어 보려는 대야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전선(戰線)에서 전선으로 동분 서주하기를 장장 30여 년,

그간 여 황후는 젊은 나이로 얼마나 많은 고독과 함께 불안과 걱정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을 것인가 ?

그러나 본시 성품이 강인하기 짝이 없었던 여 황후는 남편이 대업을 성취하는 데 아낌없는 협력을

다해 온 것은 물론이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있어, 내조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던 것이었다.

 

천하만 통일하고 나면,

여 황후는 천하의 국모(國母)로서 유방과 더불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천하를 통일하는 날이 오고 보니,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여 황후에게는 오직 <황후(皇后)>라는 허울 좋은 명칭 하나만을 남겨 주었을 뿐,

하룻밤도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통일된 이후에는 남편 유방은 더 많은 찬란한 여색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
게다가 이제는 여 황후는 너무도 늙어 버렸기 때문에 거들떠 보지도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수수 대전에서 참패할 때에 하룻밤 인연으로 만난 젊고 아리따운 척씨 부인을 공공연히 서궁(西宮)에 데려다 놓고,

낮이고 밤이고 갖인 애정을  쏟아 오고 있으니, 여 황후는 자신으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간

척씨 부인에게 이를 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냐 ! 이년, 어디 두고 보자.

나는 이 원한을 언젠가는 네년에게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 )

 

이렇게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위세에 눌려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밤마다 독수 공방(獨守空房)을 하며 치밀어 오르는 정염(情炎)을 억제하며 살아가자니

척비에 대한 복수심은 날이 갈 수록 뼈에 사무칠 지경이 되었다.

문제는 거기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여 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영(盈)을 이미 태자로 책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척비는 남편을 이불 속에서 구워삶아 가지고 자신의 아들인 여의(如意)로

태자를 바꿔 치우려는 책동까지 하지 않았던가 ?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여의가 자신의 아들인 <영>을 제치고, 태자로 책봉된다면

여 황후는 <황후의 자리>까지 졸지에 척비에게 빼앗겨 버리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겠나 ? 

천만 다행으로 황태자를 바꿔 치우는 문제는

조정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장량 선생의 도움을 얻어 원만하게 해결하기는 하였으나,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갈등과 잡음은 따지고 보면 척비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려니,

자연스럽게 여 황후는 척비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척비가 남편을 빼앗아 간 것만도 가슴을 치며 통곡할 노릇인데, 이제는 황후의 자리까지 빼앗아 가려고

유방을 꼬득였으니, 여 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 오르는 것은 여자로서는 당연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마누라를 둘 씩이나 거느렸다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럽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집 생활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의 선망(羨望)일 뿐이지,

정작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두 여자의 입장과 처신 사이에서

<애정>의 배분(配分)을 공평 무사하게 할 수 있는 비결이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런가 ?

그뿐만이 아니라 남자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사회적인 위세와 집안에서의 위엄까지도 두 여자에게 공평하게 나눌 수는 없는 일이 아니런가 ?
그나저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씨앗 싸움이다.

일반 세인(世人)들 조차에서도 <씨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속담도 있는 형편인데,

유방의 경우에는 천하의 대권(大權)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

그렇다면 어떤 씨앗이 장차 이를 물려받을 것인가 ?

유방은 오랫동안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아온 관계로, 씨앗 싸움의 심각성을 몸소 겪어 왔었다.

그러면서 여 황후와 척비는 공존(共存)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는 임종에 즈음하여 태자를 불러 놓고 그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해 주도록 간곡한 유언까지 남기지 않았던가 ?

그러나 씨앗 싸움이란 유언 하나로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유방이 죽었을 때 여황후는 60 고개를  바라보는 노파였다.

게다가 남편이 죽고 자신의 아들인 태자가 제위에 오르자, 그녀는 태후(太后)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60이 다 된 일국의 태후라면 누가 보아도 점잖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씨앗 싸움의 감정에는 나이도 체면도 없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대뜸 떠오른 생각은,
척비년을 그렇게나 알뜰살뜰하게 감싸 주던 영감이 죽었으니,

이제야 말로 그년과 그년의 아들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릴 때가 되었구나.

이 년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너희 모자를 죽여 없애리라...
하는 복수심뿐이었다.

여 태후의 가슴속에는 척씨 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이 이토록이나 사무쳐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숨을 거두기가 무섭게 여 태후는 조커뻘 되는 <여수>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주상께서 돌아가셨으니까, 척녀가 아들에게로 도망을 갈지 모른다.

너는 지금 서궁으로 관헌(官憲)들을 데리고 달려가

그년을 당장 영항(永巷: 궁녀들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엄하게 감시토록 하여라."
여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한다.

 

"돌아 가신 폐하께서 그렇게나 총애하시던 <서궁(西宮> 마마>를

무슨 까닭으로 영항에 감금하시라는 분부이시옵니까 ?"
그러자 여 태후는 화를 발칵 내며 말한다.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년을, 너는 어째서 <서궁마마>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느냐 ?

아무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당장 달려가 그년을 하옥시키란 말이다.

만약 나의 명령에 차질이 있게 된다면 너 자신도 무사치 못하리라."

서릿발 같은 무서운 명령이었다.
태후의 명령이고 보니 여수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수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아무 까닭도 없이 <척비를 하옥시키라>는 태후의 명령이

너무도 무모하게 여겨져서 여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마마의 분부대로 그분을 하옥은 시키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하옥시키면 매우 복잡한 사건이 발생할 것 같사오니,

그 점을 아울러 생각해 주시옵소서."

 

"그년을 하옥시킨다고 무슨 복잡한 사건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냐 ?"
여수가 예측한 대로, 태후는 앞뒤를 전혀 생각지 않고 무작정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하였다.
여수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마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분에게는 <여의>라는 아드님이 있사옵니다.

지금 <조왕(趙王)>으로 있는 아드님이 자신의 모친이 하옥된 것을 알게 되면

절대로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조왕 자신은 아직 나이가 어려 별로 두려워할 존재는 못 되오나,

그의 곁에는 주창(周昌)이라는 명모사(名謀士)가 있사옵니다.

만약 주창이 조왕모(趙王母)를 구출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온다면,

그들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옵니까 ?"

태후는 전혀 생각조차 못 했던 말에 크게 당황하였다.

지금 나라가 상중(喪中)에 있는 이 판국에

, 주창이 <그년>을 구출하기 위해 대군을 몰아쳐 온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년>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 도망이라도 치는 날이면 영원히 복수를 못 하게 될 것이 아니겠나 ?
태후는 입술을 깨물며 오랫동안 심사 숙고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결연한 어조로 말한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간에 우선은 그년을 하옥시켜라.

그리고 나서 여의를 좋은 말로 꾀어다가, 그놈까지 죽여 없애 버리면 될 게 아니겠느냐."

무서운 복수심이었다.
그러기에 여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실 바에는 그분을 옥에 가두어 나쁜 소문이 퍼지게 할 게 아니라,

숫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태후는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나는 그년 때문에 십 수년을 애간장을 태워 왔었다.

그년을 죽이기는 죽이되, 단박에 죽일 일이 아니라, 두고두고 애를 태우다가 몇 년후에나 죽일 생각이로다.

그래야만 나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

 

악독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여자들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

이렇게 태후의 말에는 무서운 독기(毒氣)가 서려 있었던 것이었다.
태후는 척비를 하옥시키고 나자, 이제는 조왕 여의까지 죽여 버릴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유방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신제(新帝)의 이름으로 위조 조서를 작성하여 환관 양운(楊雲)을 시켜 조왕에게 보냈다.

조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선제(先帝)가 돌아가신 뒤에,

너의 생모(生母)께서 병으로 위독하시니 빨리 오너라.>

조왕 여의의 나이는 이제 겨우 13살이었다.

따라서 아직은 어머니의 슬하에서 모정을 받아야 하는 어린 상태였기에,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기에 여의는 조서를 받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즉석에서 재상 주창을 불러 상의한다.

 

"아바마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께서 병을 얻으셔서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으니,

나는 장안으로 빨리 가 봐야 하겠습니다."
주창은 문제의 조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고 나서 조용히 아뢴다.

 

"이 조서는 위조 조서이오니, 대왕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소서.

황제께서 붕어하신 것은 사실이오나. 대왕모(大王母)께서 병중이란 말은 근거 없는 거짓말 이옵니다."
여의는 놀라며 말한다.

"이 조서가 위조 조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어머님이 병중이 아니라면 신제(新帝)인 형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조서를 보내셨겠습니까 ?"
주창이 다시 대답한다.

 

"신제께서 대왕 앞으로 조서를 보내신다면 반드시 친필 조서를 보내셨을터인데,

이 조서의 글씨는 신제의 필적이 아니옵니다.

필적이 다른 것을 어찌 진짜 조서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

"그러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거짓 조서를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
주창은 오랫동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연히 입을 열어 답한다.

 

"황실의 내분지사(內粉之事)이므로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여 황후께서는 옛날부터 대왕을 살해(殺害)하려는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장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여 황후의 뜻을 쉽게 이룰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선제(先帝)께서 돌아가신 뒤, 대왕모의 거짓 와병(臥病)을 핑계로

대왕을 장안으로 불러 올려 살해하려고 거짓 조서를 보낸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여의는 그 말을 얼른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경은 이 조서를 거짓 조서라고 하시지만, 그 말씀을 믿고 상경하지 않았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런 불효(不孝)가 어디있겠습니까 ?"
주창은 머리를 흔들며 다시 말한다.

"이 조서는 분명한 가짜 조서이옵니다.

그것만은 신이 목숨을 걸고 단언할 수 있사옵니다."

 

"어디다 근거를 두고 그런 장담을 하십니까 ?"

 

"필적도 신제의 필적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조서에 찍힌 어인(御印)도 황제께서 쓰시는 신인(信印)이 아니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조서를 보내실 때에는 여엿한 사신(使臣)을 보내는 법이온데,

이 조서를 가지고 온 양운이라는 자는 여 황후의 측근인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자 이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조서를 믿고 상경하셨다가는, 대왕의 신변에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음 .....

정말로 그럴까요 ?"

 

"그렇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양운을 적당히 달래서 돌려 보낼 터이니,

대왕께서는 신을 믿어 주시옵소서."

주창은 어린 조왕을 가까스로 달래 놓고,

이번에는 양운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내리신 조서는 잘 받아 보았소이다.

대왕은 생모께서 중병중이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오.

자식된 도리로서는 당장 문병을 가셔야 옳을 것이오.

그러나 공교롭게도 대왕 자신이 지금 신병으로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 계시기 때문에

도저히 문병을 가실 형편이 못 되는구려.

귀공은 그리 알고 오늘은 돌아가셔서 이곳 사정을 사실대로 여쭤 주시오."
주창은 양운을 돌려 보낸 뒤에 조왕을 찾아와서 아뢴다.

 

"양운이라는 자를 듣기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그자가 헛물을 켜고 돌아갔으니까, 여 태후는 조만간  다른 사신을 또 보내올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사신이 아무리 여러 번 보내 와도, 대왕께서는 저들의 함정에 결코 말려들지 말아야 하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경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조왕 여의는 우선 당면한 죽음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한편, 여태후는 양운이 헛물을 켜고 돌아오자 길길이 분노하며 양운에게 따져 묻는다.

 

"조서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병을 핑게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

여의가 병 때문에 못 오겠다고 했으면, 네가 보기에도 그게 사실인 것 같더냐 ?"

 

"조왕을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고 주창을 통해 말만 들었을 뿐이옵니다.

짐작컨데 조왕은 병이 든 것은 아니오나, 주창이 앞을 가로막고 못 오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여 태후는 더 한층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저런 죽일 놈이 있나 ?

주창이란 자가 중간에서 그런 농간을 부린다면,

이제는 그놈부터 죽여 없애야 하겠구나 ! "

 

한번 결심을 하게 되면 주저할 줄을 모르는 것이 여 태후의 성품이었다.
태후는 즉석에서 번쾌의 아들인 번항(樊亢)을 불러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대에게 정병 5백 명을 줄 테니,

그대는 지금부터 한단으로 달려가 주창이라는 자를 잡아 오도록 하여라.

만약 그자가 순순히 불려오지 않으려 한다면 목을 잘라 와도 무방하다."

번항은 명령을 받고, 곧 한단으로 떠났다.
주창은 첩자들을 통하여 그런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왕을 보내라면 못 보내겠지만, 나야 무엇이 두려워 못 가겠느냐.

나는 언제든지 소환에 응할 자신이 있다."

주창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왕 여의는 크게 걱정하며 만류한다.

 

"여 태후가 군사를 보내어 경을 부른다니, 무슨 까닭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함부로 가셨다가 무슨 변을 당하실지 모르니, 경은 가셔서는 아니되시옵니다."
그 말을 듣자 주창이 조왕에게 다시 아뢴다.

 

"신은 태후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오니, 신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옵소서.

다만 신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신이 없는 동안에 누가 대왕을 보필해 드릴까 하는 것이옵니다."
여의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나는 여기서 편히 앉아 있는 몸인데,

무슨 그런 걱정까지 하십니까 ?"
그러나 주창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이번 일을 그처럼 안일하게 생각하셨다가는 큰일나시옵니다.

신이 이곳을 떠나게 되면, 태후는 대왕을 장안으로 불러 올리려고 또다시 사신을 보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장안으로 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그 점만은 거듭 명심해 주소서."

 

"알겠습니다.

경은 빨리 돌아오셔서, 나를 끝까지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창은 조왕과 눈물로 작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우 주선(周宣)을 불러 부탁을 한다.

 

"나는 번항이 도착하는 대로 그와 함께 장안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단을 떠나기 전에.황제께 올릴 비밀 표문(表文)을 써 줄 테니,

너는 나보다 장안으로 먼저 달려가 표문을 황제께 빨리 올리도록 하거라.

그래야만 조왕의 일이 잘 되어갈 것이다."
그러면서 주창이 혜제에게 표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선제(先帝)께서는 태후가 여의 공자를 해칠 뜻을 품고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시려고 여의 공자를 머나먼 조왕으로 보내셨던 것이옵니다.

그리고 신에게는 <여의 공자를 최선을 다해 도와주라>는 특별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신은 오늘날까지 전력을 기울여 조왕을 보필해 왔사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돌아가시자 사정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태후께서는 사신을 한단으로 보내어 조왕을 장안으로 빨리 올라오라고 성화같이 재촉하고 계시니,

그렇게 되면 어떤 참변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리하여 신이 조왕의 장안 행(行)을 결사적으로 막아오고 있던 중에

이제는 신 마저도 장안으로 불러 올리셨으니,

신이 이곳 한단을 떠나고 난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옛날부터 동기간인 여의 공자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줄로 알고 있사와 크게 걱정 되는 바는 없사오나,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사오니,

신이 한단을 떠나게 되더라도. 폐하께서는 조왕의 신변에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도와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신하 주창 올림

새로 등극한 혜제(惠帝)와 여의는 비록 이복 형제이지만 혜제가 여의를 무척 사랑하는 줄로 알고 있었기에,

주창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이런 표문을 비밀리에 혜제에게 손수 써 올린 것이었다.
이렇게 주창은 혜제에게 예방선을 쳐놓고 나서, 곧 도착한 번항과 함께 장안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주창이 동관(潼關)이라는 곳에 도착을 하고 보니,

그곳에는 관영 장군이 혜제의 명을 받고 주창을 마중 나와 있었다.
관영과 주창은 막역한 친구사이라, 주창은 크게 반가워하며 관영에게 묻는다.

 

"아니,

자네는 내가 어떻게 오는 줄을 알고 여기에 나와 있는가 ?"

 

그러자 관영은 번항을 들으라는 듯이,

주창에게 손짓을 해보이며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

 

"태후마마께서 사신을 보내어 조왕을 상경토록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번번히 앞에 나서서 방해를 놓았다면서 ?

주상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크게 노하시면서,

자네를 당장 체포해 오라고 하셨네. 그러니 자네는 두말 말고 나와 함께 폐하한테로 가세."
그리고 번항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주상의 명령대로 내가 책임지고 체포해 갈 테니,

자네는 태후궁으로 가서 태후마마에게 사실대로 여쭙게."
관영은 번항을 보내고 나서 주창에게 다시 말한다.

 

"주상께서 자네가 올린 표문을 보시고 크게 걱정을 하시면서,

자네를 태후 앞으로 보내지 말고 어전으로 직접 데려 오라고 하셨네.

그 때문에 내가 마중을 나왔으니, 자네는 주상을 만나 뵙거든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도록 하게."
이윽고 주창이 입궐하자, 혜제는 무척 반가워하면서 말한다.

 

" 내 아우 여의 때문에 경이 많은 애를 써 오셔서 고맙기 한량없소이다.

문중에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 내 아우 여의는 내가 온갖 힘을 다해 보호해 주도록 하겠소.

그러나 태후께서는 경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모양이니,

무슨 일로 노여워하시는지 태후를 이 자리에 모셔다가 이유를 묻도록 하겠소."

 

이윽고 여 태후가 들어와 상좌에 앉자,

혜제는 머리를 조아리며 묻는다.

 

"태후께서는 한단에 있는 조왕에게 장안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는데

어린 조왕을 무슨 용무로 부르셨사옵니까 ?"
태후는 주창을 증오의 눈으로 노려보다가 혜제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조왕의 생모인 척녀가 지난번에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아들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하기에,

내가 조왕을 불러 올리려고 했던 것이오.

그러나 주창이란 저자가 그때마다 조왕의 상경을 훼방한다기에

나는 저놈의 행실이 너무나도 괘씸하여 번항을 보내 저놈을 붙잡아 오라고 했던 것이오."

태후로서는 주창을 죽이기 위해 장안으로 불렀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혜제는 태후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말했다.

 

"선제께서 여의를 조왕으로 보내실 때에 주창을 보필자로 따라 보내시면서,

설사 조정에서 조서가 내려가더라도 조왕은 임지를 떠나지 말도록 분부가 계셨던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조왕을 장안으로 올려 보내지 않은 것은 선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지,

태후마마의 명령을 거역한 죄는 아닌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하니 그 일은 특별히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태후는 혜제가 두둔할수록 주창이 더욱 미웠다.
태후는 주창을 잡아오는 길로 곧장 죽여 버릴 결심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중간에서 주창을 두둔하고 나서는 바람에,

태후는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이제는 생트집을 잡고 늘어진다.

"주창은 잘 듣거라.

조왕과 나는 모자지간(母子之間)이 아니냐.

그런데 그대가 중간에 나서서 조왕과 나와의 모자지정을 갈라놓았다.

그런 나쁜 짓을 한 그대를 조나라에 다시 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대는 앞으로는 장안에만 머물러 있도록 하라.

나의 명령을 또다시 거역했다가는 결탄코 용서하지 않으리로다."

태후는 주창을 장안에 억류시켜 놓고,

그 사이에 조왕을 불러 올려 죽여 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

 

주창은 머리를 수그린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태후가 돌아가 버리자, 황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창에게 말한다.

"경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태후는 조왕 모자를 어떡하든지 죽여 없애려고 하고 계시오.

지난번에도 경이 중간에서 조왕을 상경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던들 조왕은 이미 태후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이오.

그러니까 태후는 경에게 원한을 품고 한단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이것 참, 일이 매우 딱하게 되었구려.

그렇다고 태후의 명을 거역하고 경이 한단으로 돌아가버리면, 그때에는 조왕 모자의 장래가 점점 나빠질 것이오.

아무튼 경은 당분간 나와 함께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합시다."
주창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특별히 도와주지 않으시면 황실에 처참한 참극이 벌어질 것이옵니다.

신이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오나,

신이 한단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린 조왕을 누가 도와드릴 것이옵니까.

보나마나 태후는 제가 없는 틈을 타서 한단으로 사신을 다시 보내 조왕을 반드시 불러 올릴 것이옵니다.

그렇게 조왕께서 멋모르고 장안으로 올라오시는 날이면, 그날로 참변을 당하시게 될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주상께서는 그런 참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생각할수록 골머리가 아팠다.

 

"만약 조왕이 태후의 부르심을 받고 멋모르고 상경하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 참변을 맊을 수 있겠소 ?"

 

주창은 눈을 감고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조왕께서 멋모르고 상경하시게 되면,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주상께서 패상(覇上)까지 몸소 마중을 나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조왕을 그 길로 대궐로 모시고 오시옵소서.

조왕을 참극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길이 있을 뿐이옵니다."
혜제는 주창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경의 의견은 참으로 묘안이시오.

조왕이 언제 누구의 꾐을 받아 상경하게 되지 모르니까,

몇 사람의 장수를 장안에 이르는 길목에 배치시켜 조왕이 상경하거든 우리가 먼저 알아내도록 합시다."

 

혜제는 즉석에서 장륭,이보,축통 등 대장들을  한산에서 오는 대로(大路)를 검색하게 하고

기퉁,유범두 장군으로 하여금은 한단에서 오는 소로(小路)를 지키게 하였다.
황제는 이처럼 전력을 기울여 황실의 참극을 막아내기 위하여 애를 썼던 것이다.
한편, 태후는 태후궁르로 돌아오자 심이기와 여수 등 두 심복 부하를 불러 명한다.

 

"주창이란 놈은 한단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 놓았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여의를 장안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겠느냐.

좋은 의견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심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주창과 척비의 이름으로 조왕에게 <빨리 상경하라>는 거짓 편지를 보내도록 하시옵소서.

그와 같은 편지를 보내시면, 조왕은 틀림없이 상경할 것이옵니다."

 

태후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즉시 조왕에게 주창과 척비의 이름으로 두 통의 편지를 동시에 보냈다.

한편, 조왕 여의는 주창이 장안에서 빨리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중인데,

하루는 근시(近侍)가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와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장안에서 사신이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사온데,

한 통은 대왕모마마께서 보내신 친서이옵고, 다른 한 통은 주창 대부께서 보내신 친서이옵니다."
조왕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두 통의 편지를 즉석에서 읽어 보았다.

 

생모가 보낸 편지에는,
.... 나는 병이 위독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형편이로다.

죽기 전에 네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구나. 에미의 마지막 소원이니

너는 하루속히 서궁으로 돌아와 이 에미를 만나다오.
하는 사연이 씌어 있었고,

 

대부 주창의 편지에는,
대왕모마마의 신병이 이렇게나 위독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 형편으로는 언제 돌아가시게 될지 모를 형편이오니,

대왕께서는 제만사(除萬事)하시고 빨리 상경하시와 최후의 효공(孝供)을 드리도록 하시옵소서.

신은 대왕께서 속히 상경하시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하는 사연이 씌어 있는 것이었다.
어린 조왕은 두 통의 편지를 읽어 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빨리 상경해야 하겠으니,

길을 떠날 준비를 급히 차리시오."

 

그러자 중신들이 입을 모아 떠나기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조왕은 누구의 만류도 듣지 않고 그날로 장안으로 향했다.

한편, 여 태후는 조왕이 거짓 편지를 받아 보고 장안을 향하여 한단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심복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조왕이 상경하는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되면 반드시 대궐로 데려가려고 할 것이니,

그렇게 못 하도록 사람을 놓아 조왕을 반드시 나한테로 데리고 오너라."

태후는 이번 기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왕을 기어코 죽여버릴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여 태후는 많은 역사(力士)들을 동원하여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조왕을 강제로라도 납치해 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조왕이 회경(懷慶)이라는 곳에 도착하자

대장 장릉,이보,축통 등이 조왕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황명을 받잡고 신 등은 대왕을 영접하러 나왔사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조왕이 패상(覇上)에 도착했을 때에는,

황제가 친히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 주며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현제(賢弟)는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자기 상경하는가 ?"
조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태후께서 상경하라는 분부가 여러 차례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병중에 계신 어마마마와 주창 대부께서도

급히 상경하라는 편지를 주셨기에 급히 상경하는 중이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내가 직접 마중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구나.

그런 거짓 편지를 받고 함부로 나다니다가는 신변에 참화(慘禍)가 일어 날 것이니,

현제는 아무도 만나지 말고 금후에는 대궐에서 나와 함께 기거하기로 하자."

황제가 이렇게 말을 하며 조왕을 대궐로 직접 데리고 가는 바람에

태후가 보낸 역사들은 조왕을 납치해 갈 수가 없었다.
태후는 납치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자

또다시 이를 갈며 심복 부하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황제가 제아무리 조왕과 숙식을 같이 하기로, 조왕을 납치해 올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궁중의 동태를 엄히 감시하고 있다가, 기회가 있는 대로 조왕을 나한테 잡아오도록 하여라."

한편, 주창은 조왕을 비밀리에 만나 자기 이름으로 보낸 편지는 거짓 편지였음을 알려 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태후를 만나지 말 것을 누누이 경고하였다.
조왕은 그제서야 태후가 무서운 흉계를 꾸미고 있음을 알고 몸을 떨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황제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여 태후는 그럴수록 분노와 감정이 치밀어 올라,

그때부터는 대궐의 궁녀들을 매수하여 조왕의 일거 일동을 상세하게 보고하게 하였다.
황제는 성품이 온후한데다가 정의감이 누구보다도 강한 편이어서

조왕을 죽여 없애려는 태후의 흉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왔었다.

 

더구나 그는 선제(先帝)로부터

<너는 어린 동생인 조왕의 신변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잘 보살펴 주라>는

유언까지 듣지 않았던가 ?

 

그러나 황제는 성품이 워낙 내성적이어서 태후의 흉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조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소극적인 방도만을 써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황제는 조왕과 함께 사냥을 가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날이 오자, 황제는 새벽같이 사냥 준비를 갖추고 나왔으나,

조왕은 그날따라 몸이 불편하여 사냥을 같이 갈 수가 없었다.
황제는 매우 섭섭하게 여기며 말한다.

"그러면 오늘은 나만 다녀올 테니 현제는 편히 쉬고 있으라."
황제가 조왕을 혼자 남겨 두고 사냥을 나가 버리자,

궁녀들은 그러한 사실을 즉각 태후에게 알렸다.
그러자 태후는 환관 한 사람을 보내 조왕을 이런 말로 꾀어 오게 하였다.

 

"소인은 척후(戚后)마마께서 보내신 환관이옵니다.

척후마마께서는 대왕이 상경하신 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으시므로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고 계시옵니다.

마마의 소원이 그러하오니, 대왕께서는 오늘은 척후마마를 꼭 찾아 뵙도록 하시옵소서.

마마께서는 대왕의 내림을 무척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환관은 여 태후가 조왕을 꾀어 가기 위해 보낸 사람이었다.
조왕은 그러잖아도 생모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던 판이었다.
그러나 근본을 모르는 사람의 말을 함부로 믿을 수가 없어서, 즉석에서 이렇게 물어 보았다.

 

"그대의 말은 잘 알겠네.

그런데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심부름을 왔는가 ?"
문제의 환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소인은 선제를 옛날부터 오랫동안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척후마마께도 총애를 받아 오고 있는 장록(張祿)이라는 환관이옵니다.

선제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줄곧 서궁(西宮)에서 척후마마의 심부름을 돕고 있는 몸이옵니다."

 

"아 그래 ?

나의 어머님을 그처럼 도와 드리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네그려. 지금 어머님의 병환은 어떠하신가 ?"

 

"병환은 별로 대단치는 아니하시옵니다만,

대왕마마를 만나고 싶으셔서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계시는 형편이시옵니다."
조왕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머님을 만나 뵈러 가야 하겠네.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지금 당장 나를 인도하게."
이리하여 조왕은 마침내 여 태후의 독수(毒手)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윽고 조왕이 장록에게 인도 받아 온 곳은 서궁(西宮)이 아니라,

여 태후가 거처하는 미앙궁(未央宮)이었다.
조왕은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 채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이라도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여 태후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중문(中門)까지 마중을 나와 있다가,

조왕을 부등켜 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오오, 사랑하는 내 아들아 !

네가 에미를 만나러 와 주니, 세상에 이런 기쁨이 어디 있겠느냐.

에미는 그동안 네가 무던히도 보고 싶었느니라.

어서 들어가자."

여의는 공포감에 전신이 떨려 왔지만, 이제 와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태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마마마 !

소자는 멀리 한단에 떨어져 있는 관계로 자주 문안을 드리지 못하와 불효 막급하옵니다."
태후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말한다.

 

"네가 효성이 아무리 극진하기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그리운 정이 태산 같구나.

오늘은 피차간에 쌓이고 쌓였던 회포를 마음껏 풀어 보기로 하자."
말만 들어사는 애정이 푹푹 쏟아지는 모정이었다.

 

여 태후는 그렇게 수다를 떨며 여의를 내전으로 데리고 들어서더니,
"여봐라 !

오늘은 그립고 보고 싶던 내 아들이 멀리서 찾아왔으니,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야 하겠다.

우선 주안상을 빨리 올려라."하고 궁녀들에게 명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주안상이 들어오자,

태후는 여의에게 손수 술을 따라 주며 말한다.

 

"오늘은 너를 하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네 술잔만은 내가 따라 주야 하겠다.

어서 이 술잔을 받아라."

 

여 태후가 여의에게 따라 준 술은 한 모금만 마시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짐독주>라는 무시무시한 독주였다.

여의는 물론 그 술이 그렇게나 무서운 독주인 줄은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암만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술만은 마시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러나 태후가 내려 주는 술을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여의는 생각다 못해 손에 받아 든 술잔을 태후에게 받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마마마 앞에서 소자가 먼저 술을 드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 이 술은 어마마마께서 먼저 드신 연후에, 소자에게 잔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면 소자가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여의는 독주가 아니라는 확증을 얻기 위해 그렇게 꾸며대었던 것이다.
그러자 태후는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여의를 나무란다.

 

"네가 예절이 그렇게나 바른 줄은 미처 몰랐구나.

그러나 예절에도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방도가 있느니라.

너는 아직 나이가 어려 거기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여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후에게 반문한다.

 

"예절에는 여러 가지 방도가 있다는 것은 무슨말씀이시옵니까 ?

소자가 아직 미거하여 예절을 잘 모르오니, 어마마마께서 자세하게 하교해 주시옵소서."
태후는 여의의 어깨를 정답게 두드려 주면서 말한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네 총명이 기특하기 이를 데 없구나.

너와 나는 모자지간이기는 하지만 오늘에 한해서만은 너는 주빈(主賓)이고,

나는 너를 대접하는 주인이 아니냐 ?

천 리 타향에서 찾아온 귀빈을 제쳐 놓고 어찌 내가 먼저 술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 대신 네가 술을 마시고 나거든, 그 술잔을 내게 돌려라.

네가 주는 술이라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마시리로다."

술을 먼저 마시고 난 뒤에 그 술잔을 자기한테 돌려 달라는 말에 여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 술이 독주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여의는 마침내 술을 마시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면 소자가 이 술을 먼저 마시고 나서 어마마마께 새로 따라 올리겠습니다."
마침내 여의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술은 얼마나 독한 술인지,

여의는 술을 두 모금 마시다 말고 별안간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방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달아 몸부림을 치며 괴성을 지르는데,

그때 여의에 입에서는 이미 붉은 피가 연실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는 눈썹 한 번 까딱 하지 않고 이처럼 처참한 광경을 줄곧 회심의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친 사람 처럼 방바닥을 구르고 기어 다니다가,

마침내는  고개를 푹 꺾으며 숨을 거둬 버렸다.
여 태후는 여의의 광적인 발작에 이은 죽음을 확인하자 별안간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호호호,

내가 이제야 원수 하나만은 가까스로 처치해 버렸구나."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없는 악독한 말이었다.
태후는 즉석에서 시종들을 불러 명한다.

 

"여봐라 !

이 시체를 당장 끌어내어 후원 오동나무 밑에 뭍어버려라.

그리고 이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자는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니, 모두들 입을 조심하거라."

 

달려온 시종들은 너무도 끔찍스러운 광경에 모두들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태후의 서슬이 워낙 푸른지라, 이런 사실을 누구도 감히 입 밖에는 내지 못했다.

이리하여 어린 조왕 여의는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척비의 몸에서 태어난 죄로 여 태후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그러나 악독하고도 처절한 이런 범죄 사실이 과연 언제까지나 비밀이 보장될 것인가.
                                ...

한편, 혜제가 새벽에 사냥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여의가 대궐 안에 없지 않은가 ?
혜제는 깜짝 놀라 시종에게 물었다.

 

"조왕이 보이지 않으니 웬일이냐 ?

조왕은 어디 가셨느냐 ?"

 

"조왕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어떤 사람과 함께 나가셨사옵니다.

짐작컨데 조왕께서는 미양궁으로 태후마마를 뵈러 가신 것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혜제는 기절 초풍 할 듯이 놀랐다.

 

"뭐야 ?

조왕이 미양궁으로 태후를 뵈러 갔다고 ?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냐 ?"

 

"자세히는 알 길이 없사오나,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조왕께서는 태후를 모시고 술을 마시고 계셨다고 하옵니다."

 

"뭣이 ?

조왕이 태후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구 ?"

혜제는 불길한 예감이 솟구쳐 올라, 여의를 구출하려고 부리나케 미양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양궁에는 조왕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태후는 혜제가 나타난 것을 보고 천연스럽게 묻는다.

 

"주상은 무슨일로 이렇게 늦게 오셨소 ?"
혜제는 문안도 생략한 채 다급하게 물었다.

 

"조왕이 이곳에 왔다고 들었는데, 조왕은 어디로 갔사옵니까 ?

저는 조왕을 데려 가려고 왔사옵니다."

 

혜제가 노골적으로 태후를 비난하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태후는 별안간 얼굴에 노기를 띠며 황제를 나무란다.

 

"조왕을 데려가려고 왔다구요 ....?

흥 ! 조왕은 주상의 원수요.

그런 놈을 데려다가 어떡하겠다는 것이오 ?"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혜제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왕이 나의 원수라뇨 ?

태후께서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

조왕은 사랑하는 나의 아우입니다.

형제가 어떻게 원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
그 말을 들은 여 태후는 화가 동하며 거친 말을 쏟아내었다.

 

"주상은 내 말을 똑똑히 들어 보시오.

선제가 생존해 계실 때, 선제는 여의 모자를 편애한 나머지 태자를 내쫒고 그놈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소.

그때에 장량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놈이 천자가 되고,

주상과 나는 지금쯤은 죽거나 거지 신세가 되었을 것이오.

그 같은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상은 그 원수놈을 결사적으로 끼고 돌기에,

나는 그 꼴을 보다 못해 오늘은 그놈을 꾀어다가 독주를 먹여 죽여 버렸소."

"엣 ?

조왕을 독살시켰다구요 ?"

 

혜제는 까무러칠 듯이 놀라다가,

이내 미친 사람처럼 태후에게 마구 떠들어댔다.

 

"여의를 독살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여의와 나는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지간이 아니오 ?

형제간에 누가 천자가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오.

어마마마는 자식을 죽였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에도 벗어나고 인도(人道)에도 벗어나는 짓이오."

이렇게 혜제가 광태(狂態)를 부리며 덤벼드는 바람에

여 태후는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옆방으로 피해 버렸다.

 

그러나 혜제에게 공격을 받고 보니,

<그년 모자>에 대한 태후의 앙심은 더욱 끓어 올랐다.

 

(내 남편을 빼앗아간 원수의 자식을 죽인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 !

오냐, 두고 보아라. 황제가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나는 <그년>까지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야 말리라.)
워낙 심독한 여 태후인지라, 가슴속에 맺힌 원한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혜제가 광태를 부리고 돌아간 바로 그 다음날,

여 태후는 심복 부하인 여수를 불러 묻는다.

 

"영항(永巷)에 감금해  둔 <그년>은 아직도 살아 있느냐 ?"
<그년>이란 척비(戚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예,

아직도 감금해 두고 있사옵니다."

 

"음 ....

이번에는 그년을 죽여 버릴 차례다."
태후는 그렇게 말하며 새삼스러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여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마마께서 분부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죽여 버리겠사옵니다."
태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그년을 아무렇게나 죽여서는 안 된다.

그년이 죽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하겠으니, 내일 아침에는 그년을 이리로 끌어내어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여수는 척비를 끌어오려고 영항으로 달려갔다.

영항에 갇혀 있는 척씨 부인의 몰골은 불쌍한 모습이었다.

지난 날 유방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오던 때에는 시녀들이 3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몸에는 언제나 비단옷을 감고, 꽃 피는 봄날과 달 뜨는 가을 저녁이면

많은 시녀들을 거느리고 은은한 풍악 소리를 들어 가며 어원(御苑)을 거닐며

인생의 즐거움을 일삼던 그녀였었다.

그러나 유방이 죽고 나자,

그녀는 움막 같은 영항에 그날로 감금되어 햇빛조차 구경하지 못하고,

주먹밥으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한밤중에 심복으로 부리던 시녀 한 명이 비밀리에

그녀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끔찍스러운 일을 귀띔해 주었다.

 

"조왕께서 그제 미양궁으로 끌려오신 이후로 영영 소식이 없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척씨 부인은 눈물이 하염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렇다면 내 아들 여의는 필시 태후의 손에 죽었단 말이냐.

그렇다. 내 아들은 태후의 손에 분명히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이 원수를 살아서는 갚을 수 없겠지만 나는 죽어서라도 이 원수만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의 관계 ......

이것은 피차간에 타협할 수 없는 영원한 원수지간인 것이다.

여수가 태후의 명령으로 척씨 부인을 데리러 온 것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여수는 척비를 미양궁으로 끌고 가기는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녀를 은근히 동정하였다.

 

그리하여,
"부인은 지금 태후의 명령으로 미양궁으로 끌려가는 중이옵니다.

지금이라도 살고 싶으시면 태후에게 용서를 빌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오늘로서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약자에 대한 일종의 감상적인 동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이 바칠 대로 받친 척비는 그 따위 싸구려 동정에는 상대 조차 않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척비가 미양궁 뜰 아래 꿇어 앉혀지자,

태후는 대청마루를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아무 말도 아니 하고

척비를 조소의 눈으로 노려보기만 하였다.

한쪽은 강자(强者)요 한쪽은 약자(弱者)인지라,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에는 약자의 편에서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척비는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비록 뜰 아래 꿇어앉아 있기는 할망정, 얼굴을 똑바로 치켜들고 태후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태후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동시에, 일종의 전율감조차 느껴져서 자기도 모르게 호통을 내질렀다.

 

"네 이년 !

네년은 선제의 총애를 독점해 오는 동안에 황후인 나를 원수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을 태자 자리에서 쫒아 내고 네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것다 ?

네년은 그런 죄로 오늘날 이꼴이 되었건만, 아직도 반성하는 빛을 찾을 길을 없구나 !"
그러자 척비는 살기가 등등하게 즉석에서 이렇게 반격하는 것이었다.

 

"질투로 환장해 버린 마귀 같은 늙은 년아 !

너는 내 아들을 죽인 철천지한의 나의 원수로다.

내 비록 살아서는 원수를 갚을 수는 없겠지만, 

저승을 가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 원수는 잊지 않고 천 만배로 갚고야 말리라 ! "
태후는 무서운 반항에 부딪치자 독기가 오를 대로 올랐다.

 

"이년아 !

네가 발악을 한다고 네 년을 빨리 죽여 줄 줄 아느냐 !

죽이기는 죽이되 두고두고 괴롭히다가 천천히 죽여 줄 테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그자리에서 형리(刑吏)를 불러,

다음과 같이 끔찍스러운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여봐라 !

저년의 손목과 발목을 죽지 않을 정도로 차례로 잘라서 두루뭉수리로 만들어 버려라.

귀도 베고, 눈알도 뽑아 내어 측간(厠間)에다 처넣어 인분(人糞)을 주어 먹게 하여라.

그래서 이제부터는 저년을 <인제(사람 돼지)>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 "

인제란 <사람 돼지>라는 뜻이다.
여자들의 질투심과 증오심은 이렇게도 잔혹한 것이었던가 ?

씨앗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사람을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만들 수가 있다는 말인가 ? 

아무려나 척비는 손과 발이 차례로 모두 잘려 버린 채 돼지가 아닌

<인제>의 신세가 되어 측간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목숨이 원수라고나 할까 ?

척비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조차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한편, 자비심이 남달리 많은 혜제는 조왕 여의가 살해되었음을 알고 나서부터는

정치에 뜻이 없어 날마다 술과 계집으로 고민을 달래고 있었다.

 

(내가 나라를 아무리 잘 다스려 보고 싶어도,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는 이 판국에, 무슨 재주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
그렇게 생각한 혜제는 마침내 자포 자기의 타락 생활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혜제는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우연하게도 척비가 갇혀 있는 변소간에 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변을 보려고 무심코 바지를 내리다가, 사람 같기도 하고 귀신 같기도 한  괴물이

변소안 아래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기절 초풍을 할 듯이 놀라며 변소간을 뛰쳐나왔다.
그리하여 수행하던 시종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측간속에 사람 같기도 하고 귀신 같기도 한 괴물이 갇혀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 ?"
시종들은 모두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그것은

<인제>라고 부르는 것이옵니다."

 

"인제라니 

인제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 "

 

"....."

시종들은 대답하기가 거북하여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입을 다물고 대답을 못 하는 것이었다.
혜제는 그럴수록 수상스러워 마침내는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인제...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대로 말하여라.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수하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하리라 ! "

이에 시종들은 몸을 떨어가며,
"사람 같기도 하고 귀신 같기도 한 그 괴물은

선제께서 극진히 총애하시던 척비의 변신(變身)이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대답에 혜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묻는다.

 

"척비께서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괴물로 변신을 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분명하게 말해라."

시종들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척비는 태후에 의해 손과 발이 모두 잘리고 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낱낱이 품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혜제는 그 사실을 모두 듣자 통곡을 하면서 태후에게 달려가 무섭게 대들었다.

"어마마마는 선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셨거늘,

모름지기 인덕(人德)을 만인에게 베풀어야 옳을 일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마마마는 척비에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잔인 무도한 형벌을 내렸으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

 

사람에게 벌을 주려거든 무슨 벌을 주지 못해, 하필이면 이렇게도 잔인 무도한 짓을 했단 말이오.

나는 어머님의 자식임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려."

 

혜제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공박을 해 대는 바람에

태후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척비에 대한 태후의 증오심은 자꾸만 치열해 갔다.
혜제는 생모인 여 태후를 한바탕 닦아세우고 대궐로 돌아오자,

그날부터는 모든 정사(政事)를 승상에게 전임시켜 버리고,

자신은 주색에만 빠져들어 세상 만사를 잊으려는 듯이 지내게 되었다.

여 태후는 시간이 지나도 혜제가 정사를 돌보지 아니 하고 주색에 빠져 지내기를 반복하자

마침내는 자기 자신이 정권(政權)을 빼앗아 버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오냐 !

네가 에미를 배반하고 <그년>을 그렇게까지 두둔한다면,

이제는 네게서 정권도 빼앗아 와야 하겠다.)

태후는 아들조차 원수로 간주해 버리고,

그때부터는 여씨 일족을 벼슬자리에 등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승상 소하는 전대(前代)부터의 명재상인지라,

태후의 일가 친척들을 좀체로 중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는 선대부터의 유능한 공신들이 많사온데,

어떻게 그들을 제쳐놓고 아무런 공로도 없는 여씨들을 고관에 등용하옵니까 ?

옛날부터 외척(外戚)이 득세를 하게 되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옵니다."

 

소하가 여씨 일족을 등용하지 않으려는 대의 명분은 이같이 뚜렸하였다.

참으로 승상 소하는 명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혜제가 즉위한 지 2년 후인 무신년(戊申年)가을에

승상 소하가 죽고 나자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태후는 혜제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기화로,

실질적인 황제의 대권(大權)을 몸소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가 붙이인 여대(呂臺),여산(呂産),여록(呂綠),여택(呂澤)등을 마구잡이로 고관에 등용하였다.

게다가 병권(兵權)조차 그들의 손에 맡겨 버렸다.

그로부터 5년 후에 혜제가 주색에 지쳐 손(孫)을 두지 않고 세상을 떠나 버리자,

여 태후는 혜제와 아무 관련도 없는 어린아이를 천자의 자리에 올려 앉히고,

자기 자신이 <청정(聽政)>이라는 이름으로 대권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이렇게 유방이 천신 만고 끝에 이루어 놓은 통일 천하는 10년을 채 못가서

유씨의 손에서 여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여 태후는 천하를 장악하고 나자, 여씨 일족을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다.

그것은 <인제>를 죽여 없애는 일이다.

지금부터 인제를 이 자리에 끌어내다가, 사지(四肢)에 수레(車)에 매어, 그년을 네 조각으로 찢어 죽이도록 하라.

그래야만 나의 원한이 완전히 풀려 버릴 것이다."

이렇게 <인제>인 척비는 마침내 태후가 보는 눈앞에서 사지가 네 조각으로 찢어지는 처열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여 태후는 척비를 죽이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지 원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씨부려대었다.

"네년을 죽였건만,

네년에게 빼앗겼던 나의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그것이 슬프구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