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보은

오토산 2021. 8. 5. 16:17

#조주청의사랑방야화
(94)보은

 

오늘도 하늘 아래 첫동네 황둔마을은 울음바다가 됐다.
“싹불네야,

기어코 떠나가는 기여?”
싹불이 에미는 눈물짓는 호평댁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앙상한 등만 들썩이며 흐느꼈다.

 

“이제 그만 떠나세.”
고인 눈물이 쏟아질세라 싹불이 아버지는 하늘만 바라보며 마누라를 다그쳤다.

 

“이사람아,

탁배기 한잔 나누고 가야지.”

 

오복네가 술주전자를 들고 올라와 술을 따르자

싹불이 아버지는 기어이 눈물을 쏟으며 막걸리잔을 받았다.

 

대평댁은 삶은 감자를 싸 오고,

산포댁은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싹불이 손에 쥐어 주었다.

등짐을 진 싹불네 식구들이 산허리를 돌아 모습을 감출 때까지 황둔마을 사람들은

싸리재 고갯마루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저녁 연기가 골짜기 안을 가득 메우고

이집 저집 창문마다 불빛이 발갛게 새어 나오던 황둔마을은

이제 딱 일곱집만 남아 밤만 되면 두툼한 덧문까지 닫아 걸고 공포의 적막 속으로 빠져든다.
백여년 전 조상들이 나무뿌리를 캐내고 돌을 치워 일궈 놓은 터전을 한집 두집 등지고 떠난 것이다.

 

모두가 멧돼지 때문이었다.
황둔마을에 멧돼지들의 저지레가 심각해진 것은 오륙년 전부터다.

이 마을 사람들의 목줄을 쥔 곡식은 감자와 옥수수뿐이다.

 

그런데 상전벽해가 따로 있지,

하룻밤 사이에 쟁기질을 한 것처럼 멧돼지 떼들이 쑥대밭을 만들어 놓기 일쑤여서

겨울나기가 깜깜해진 마을 사람들은 퍼질러 앉아 땅을 치곤 했다.

 

사람들은 멧돼지 우두머리를 ‘떠딩귀’라고 불렀다.

황소만한 덩치에 한자나 되는 어금니가 하늘을 찌를 듯이 뻗었고

양 볼엔 수염이 텁수룩해 한눈에 보기에도 흉측한 몰골이었다.
이 떠딩귀가 백여마리나 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황둔마을을 휩쓸고 나면

옥수수는 알이 채 익기도 전에 멧돼지 밥이 돼 버렸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황둔마을 사람들은

올무를 놓고 함정을 파 보름 만에 중멧돼지 한마리를 잡아

동네잔치를 하고 머리는 장대에 박아 산 위에 꽂아 뒀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 몰랐다.

떠딩귀가 대낮에 나타나 밭일하던 싹불이 할머니를 죽이고,

용대네 아버지마저 무자비하게 어금니로 찔러 병신을 만들었다.

 

지난 시월 오복네가 집집이 돈을 거둬 멀리 정선까지 가서 유명한 최포수를 모셔 왔다.

동네 사람들이 몰이꾼이 되고 최포수는 길목을 지켰다.
하지만 교활한 떠딩귀는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최포수 뒤로 다가와 그의 등을 깊숙이 찔렀고,

최포수는 총알 한방 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됐다.

 

그날 이후 밤마다 떠딩귀가 앞장서고 멧돼지 식구들이 뒤를 따르며

지축을 흔들자 황둔마을 사람들은 오금이 저려 이불을 덮어쓰고 벌벌 떨었다.
날이 새자 싹불네 곳간이 폭삭 주저앉고 그 안에 쌓아 뒀던 옥수수 가마니가 너덜너덜해졌다.

 

떠딩귀에게 당해 노모를 잃고 곳간의 양식을 모두 털린

싹불네가 조상의 뼈가 묻힌 황둔마을을 떠나고 나자

싹불네 빈집은 폐가가 되어 멧돼지들이 차지했다.

떠딩귀가 안방을 차지하고 암놈들을 여러마리 거느리고 앉아

크크큭 콧방귀를 뀌면 집이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얼마 후 주백이네 곳간에 커다란 구멍이 나자,

일곱집은 머리를 맞댄 끝에 매일 감자와 옥수수 한소쿠리씩을

싹불네 폐가에 갖다 놓기로 했다.

 

한데 삭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천지개벽을 하듯 뒤엉킨 포효가 황둔마을을 뒤덮었다.

밤새도록 울부짖고 찢어지던 포효는 새벽녘에야 멈췄다.

이불을 덮어쓰고 벌벌 떨던 동네 사람들이 동창이 밝자 문을 열고 나왔다.

 

이럴 수가!

떠딩귀가 선혈을 쏟고 혀를 뺀 채 널브러졌고,

그 위에 올라타고 있던 커다란 호랑이 한마리가 ‘어흥!’ 하고 울더니

뒤돌아 산속으로 사라졌다.

 

“맞아,

꼬리가 짧아!”

 

오복네가 중얼거렸다.

십여년 전, 산속에 나무하러 갔던 싹불네가

절벽 아래서 피투성이가 된 호랑이 새끼 한마리를 주워 왔다.

 

어미가 멀리 사냥하러 간 사이

다른 짐승이 호랑이 굴에 들어와 새끼들을 잡아먹다가

한마리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는지 꼬리 끝이 잘려 나가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싹불네는 새끼호랑이를 정성껏 치료했다.

 

그때 마침 첫아들 싹불이가 태어났을 때라

싹불 에미 두 젖무덤의 한쪽은 싹불이가,

또 한쪽은 새끼호랑이가 빨았다.

 

닷새째 되던 날 밤,

어미호랑이가 싹불네 집 뒤에서 울자

싹불네는 에헹거리는 새끼를 문을 열고 밖에 내놓았고,

어미호랑이는 새끼를 물고 사라졌다.

 

그 새끼호랑이가 커서 떠딩귀를 물어 죽인 것이다.

그후로 멧돼지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맨 먼저 황둔마을로 돌아온 집은 싹불네다.

 

“고향 마을이 눈에 아른거려

도저히 못 살겠드라우.”

 

떠났던 다른 사람들도 한집 두집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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