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 (409)
강유의 다섯 번째 출정과 동오의 정권 교체( 1 )
낙양으로 개선하려던 사마소에게 도착한 급보는
촉한의 강유가 장성(長城)을 공격하여 군량과 마초를 빼앗고
위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조짐이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크게 놀란 사마소는 바로 문무관들을 소집하여 촉군을 물리칠 대책을 상의했다.
이때는 촉한이
연호를 연희(延熙) 21년(258)에서
경요(景耀) 원년으로 고친 해였다.
강유는 한중에 머물면서
서천 출신 장수 두 명을 뽑아 매일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강유가 새로이 발탁한 두 장수는 장서(蔣舒)와 부첨(傅僉)으로,
그 둘은 담력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워서 강유가 무척이나 아꼈다.
어느날,
강유는 회남의 제갈탄이 사마소를 토벌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며
동오 손침이 이를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어서 사마소가 낙양과 장안의 군사들을 모아서 태
후와 위주 조모를 데리고 친정(親征)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강유는 위나라의 소식에,
"이번에야 말로 대사를 이룰 기회로구나!"하고,
크게 기뻐하며 출정을 허락해 달라는 표문을 적어 후주에게 올렸다.
중산대부 초주(中散大夫 譙周)는
강유가 후주에게 표문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요즘 황제께서는 주색에 빠지셔서 오로지 환락만을 쫓으시고,
환관 황호(黃皓)의 말만 믿고 나랏일에 소홀히하고 계신데
강백약(姜伯約, 강유의 자)은 정벌에만 신경을 쓸 뿐,
군사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이래서는 나라가 안팎으로 위태롭겠구나!"
초주는 곧장
「수국론(讎國論)」(원수의 나라에 대해 논한 글)을 적어 강유에게 보냈다.
누군가가
"옛날부터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기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썼는가?"라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큰 나라에 있으면서 환란이 없으면 태만하기가 쉽고,
작은 나라에 있으면서 걱정이 있으면 늘 잘할 방법을 생각한다.
태만하면 망하고, 잘하려고 하면 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백성들을 잘 보살폈기 때문에
작은 땅에서 일어나 상(商)나라와 같은 큰 땅을 차지할 수 있었고,
전국시대 월(越)나라 구천(勾踐)도 군사들을 극진히 아낀 덕분에
약한 처지에서도 강한 오나라를 제압했던 것이다."
또 누군가
"옛날에 초나라는 강하고 한나라는 약하니 홍구(鴻溝) 땅을 경계로 삼자고 했으나,
장량(張良)은 민심이 안정되면 다시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며
군사를 일으켜 마침내 항우를 쓰러뜨렸으니,
반드시 문왕과 구천의 사례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 않는가?"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상나라와 주나라 때는 왕과 제후를 대대로 존중했고,
군신의 관계가 오랫동안 굳건했으니,
그때 한고조가 태어났더라도 칼로써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진(秦)나라가 제후국을 정벌하여 제후들을 없애고
각 지역에 지역을 관리하는 자들을 둔 이래로 백성들은 가혹한 부역에 시달렸다.
나라의 근간인 백성들이 살기 어려우니
여기 저기에서 호걸들이 들고 일어나서 서로 다투게 되었다.
지금은 진나라 말기처럼 서로 다투는 시대가 아니고
6국(제齊·초楚·연燕·한韓·조趙·위魏)이 병립하던 때와 같은 시대다.
문왕처럼 될 수는 있으나 한고조처럼 되기는 어렵다.
매사는 때와 기회가 맞을 때 움직여야 하는 법,
두 번 싸우지 않고 한 번에 이긴 은(殷)나라 탕왕(湯王)과
주나라 무왕(武王)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그들은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고 때를 잘 살폈다.
힘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어려움에 만나게 되면
그때에 가서는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만회할 길이 없을 것이다."
초주는 문답 형식을 빌어
강유에게 출병하지 말 것을 은근히 권한 것이었다.
강유는 초주의 글을 읽자마자 그것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이것은 책상 머리에 앉아서
말이나 할 줄 아는 썩어빠진 유생의 공론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천의 군사를 동원하여 다시 중원 정벌에 나섰다.
강유가 장수 부첨에게 묻는다.
"공의 생각에는
어느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좋겠나?"
부첨이 곧바로 대답한다.
"위나라의 군량과 마초는 모두 장성(長城)에 있으니
낙곡(駱谷)을 먼저 치고 침령(沈嶺)을 넘어 장성에 진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성에서 적의 군량과 마초부터 다 태워 버리고
진천(秦川)을 취하면 중원을 차지할 날이 머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같도다."
강유는 부첨의 말에 동의하여 낙곡을 우선 공략하고
침령을 넘어 장성으로 나아갔다.
그때 장성을 지키던 장수는
사마소의 친척형 사마망(司馬望)이었다.
장성에는 군량과 마초는 풍부하였으나 군사와 말은 부족했다.
사마망은 촉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왕진(王眞)과 이붕(李鵬) 두 장수와 함께
장성 밖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웠다.
이튿날,
촉군이 도착하자 사마망은 두 장수와 함께 출전했다.
강유가 직접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와 사마망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한다.
"사마소가 제 주인을 친정(親征)하게 한 것은
이각(李傕), 곽사(郭汜)가 한 짓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이제 천자의 명을 받들어 너희들의 죄를 물으러 왔으니
속히 항복하라.
어리석게 항거하거나 머뭇거리면
너희 집안의 삼족을 멸하고 말겠다!"
사마망이 큰소리로 대꾸한다.
"상국(上國)을 계속하여 침략하다니
주제도 모르고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속히 물러가지 않으면 네 놈들은
너희의 갑옷 한 조각도 되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사마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왕진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 나온다.
그 모습을 보고 촉군에서는 부첨이 대응하러 나왔다.
십여 합쯤을 어울려 싸우다가
부첨이 힘에 부치는 듯 주춤하여 약간의 빈틈이 생겼다.
그러자 왕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창끝을 부첨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부첨은 왕진에게 일부러 틈을 보인 것이었다.
부첨은 왕진의 창을 피해 몸을 휙 비틀더니 단숨에 왕진을 사로잡아
자기 말 위에 싣고 유유히 본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붕은 한껏 약이 올라
칼을 휘두르며 왕진을 구하러 나섰다.
부첨은 말의 속도를 낮추어 이붕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붕에게 거의 따라잡혔을 때,
부첨은 갑자기 왕진을 바닥에 내던지고
숨겨두었던 사릉철간(四楞鐵鐗)을 몰래 꺼내들었다.
이붕이 칼날을 부첨에게 내리치려는 순간,
부첨은 나비가 꽃에 내려 앉듯
사뿐히 몸을 돌려 이붕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순간의 힘으로 내리치니
이붕의 두 눈알이 빠져나오면서
이붕은 말 아래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다.
바닥에서 나뒹굴던 왕진 또한
촉군 병사들이 내지르는 창에 찔려 죽고 말았다.
강유는 기세를 몰아서 위군 진영으로 진격했다.
사마망은 믿던 두 장수가 눈 앞에서 순식간에 죽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강유와 맞설 생각이 싹 사라졌다.
결국 사마망은 급하게 군사들을 거두어 장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리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서 나와서 싸우지 않았다.
강유는 사마망이 장성 안으로 도망친 것을 보면서
제장들에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일단 군사들을 편히 쉬게 하고
내일 반드시 입성하도록 하자."
이튿날,
새벽부터 촉군은 성벽 바로 아래까지 진격하여
불화살과 불대포를 성 안으로 쏘아보냈다.
성 안의 초가들은 불화살에 여지없이 타버리고
성을 지키던 위군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강유는 한 술 더 떠서
마른 장작을 성문 앞에 그득하게 쌓아놓고 불을 지르라 명령하였다.
맹렬한 화염과 연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위군의 울부짖는 소리가 성 밖으로 터져나왔다.
촉군이 장성 공격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배후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렸다.
강유가 말을 돌려 뒤를 보니,
위군이 깃발을 치켜들고 북을 요란하게 울리며
강유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강유는 공격군의 후미부대를 뒤로 돌려
전군(前軍)으로 삼아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자신도 깃발 아래 서서 위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위군 진영에서 젊은 장수가 창을 잡아들고 말을 달려나온다.
나이는 스물 안팎으로 보이고 얼굴은 해사한데 기세는 당당하다.
"강유야!
이 등장군(鄧將軍)을 아느냐!:"
강유는 청년의 말을 듣고
그가 틀림없이 등애(鄧艾)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을 단단히 잡고 대적하러 말을 달려나갔다.
두 사람이 삼, 사십 합을 맞붙었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청년 장수의 창 쓰는 법이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빈틈이 도저히 날 것 같지 않자 강유가 생각했다.
'힘보다는 계책이다!
계책을 써야 이길 수 있다!'
생각하자마자 강유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왼쪽 산길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젊은 장수도 바로 말을 달려 강유를 바짝 뒤쫓는다.
강유는 창을 슬쩍 말 안장에 걸어두고
남몰래 활에 화살을 먹여 뒤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그러나 젊은 장수는 눈과 귀가 어찌나 밝은지
활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몸을 푹 숙여
화살을 아무렇지 않게 피한다.
화살은 청년의 등 위 허공을 가르며 지나간다.
강유가 뒤를 흘깃 살피는데,
젊은 장수가 강유를 향해 냅다 창을 내지른다.
강유는 재빨리 창을 피하면서
옆구리와 팔꿈치로 젊은 장수의 창대를 꽉 붙잡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젊은 장수는 당황하여
강유에게 그대로 창을 빼앗기고 만다.
무기를 빼앗긴 젊은 장수는 자기 진영으로 달아난다.
강유는 달아나는 적장을 뒤쫓는다.
'기회를 놓쳤다!
아깝다! 아까워!'
좋은 기회를 날린 강유는 뒤쫓으면서 속으로 탄식했다.
강유가 위의 진영까지 말을 달려 갔을 때,
진영 안에서 한 장수가 칼을 휘두르며 나서더니 크게 외친다.
"강유! 이 놈!
더 이상 내 아들을 쫓지 말아라!
등애가 바로 여기 있다!"
강유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강유가 등애인 줄 알고 싸우고 있던 상대는
등애가 아니라 그의 아들 등충(鄧忠)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지혜와 아들의 용맹!
놀랍구나.'
강유는 속으로 감탄하며 등애와 맞붙으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살피니 추격전 탓에 이미 많이 고단해 보였다.
괜히 그런 말을 이끌고 싸움에 나섰다가
본인과 말이 모두 위험할 수 있었다.
강유는 창을 잡아들고
그 끝을 등애에게 겨눈 채 말한다.
"내가 오늘 너희 부자들을 알았으니
이쯤에서 군사를 거두고 내일 다시 결판을 내자."
강유가 워낙 용맹한 장수인지라,
등애도 계책을 세우지 않은 싸움은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다고 느껴 말을 세우고 답한다.
"좋다.
각자 군사를 거두자.
이렇게 하기로 해놓고 비겁하게 공격하면
그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강유와 등애의 약속으로 양측의 군사는 모두 물러났다.
등애는 위수(渭水) 강변에 영채를 세우고,
강유는 산 능선 두 곳을 끼고 영채를 세웠다.
등애는 촉군의 영채를 자세히 살피더니
사마망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우리는 적이 아무리 도발해와도 절대 나가서 싸우면 안 됩니다.
오로지 굳게 지키면서 관중(關中)에서 응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 사이에 촉군의 군량과 마초는 바닥을 보일 것입니다.
그때 삼면에서 협공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내 아들 등충을 성 안으로 들여보낼테니 힘을 합쳐 성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등애는 사마망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사마소에게 급사를 보내 구원군을 요청했다.
강유는 등애의 영채에 사자를 보내서
다음날 결전을 벌이자는 도전장을 전달했다.
등애는 짐짓 도전에 응하는 척하고 사자를 강유에게 돌려 보냈다.
이튿날 오경 무렵,
강유는 진을 펴고 위군이 나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등애의 영채는 기가 모두 누워있고
북소리가 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채가 아예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촉군은 해가 질 때까지 위군을 기다리다가 그냥 철수했다.
이튿날 강유가
또 도전장을 보내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등애를 질책했다.
등애는 도전장을 들고 온 촉의 사자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서 변명의 말을 했다.
"어제는 내가 몸이 조금 불편하여 싸우러 나가지 못했네.
내일은 반드시 나가서 싸울 것이니 그대로 가서 전하게."
등애의 말을 믿고 강유는
다음날 또 군사를 일으켰으나 등애는 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기를 대여섯 차례, 부첨이 강유에게 말한다.
"등애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장군께서도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등애는 관중에서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를 삼면에서 공격할 계획인 게 분명하다.
동오의 손침에게 사절을 보내서
지원군을 얻은 다음에 등애의 뒤를 쳐야겠다."
강유도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손침에게 보낼 사자를 준비시키고 있는데,
파발꾼이 강유에게 달려 와서 보고한다.
"사마소군이 수춘성을 함락시키고 제갈탄을 죽였습니다.
제갈탄을 지원갔던 오나라 군사들은 대부분이 위군에 투항했고,
사마소는 낙양으로 돌아가다가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장성으로 오고 있습니다."
강유가 놀라며 탄식했다.
"이번에도 정벌은 그림의 떡이 되었구나!
철수하는 것이 낫겠다."
강유는 적에게 응원군이 보태지면
자신의 군대가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철군을 결정했다.
우선 군수품과 보병을 후퇴시키고
자신은 기병대를 거느리고 뒤를 끊으며 물러갔다.
이것을 본 위군의 정탐꾼이 등애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
등애는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허!
강유, 눈치는 빠르구나.
우리 대장군의 군사가 오는 것을 알고 미리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다니.
뒤쫓으면 강유의 계략에 말려들 수 있으니 그냥 가게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 즉시 정탐꾼을 보내서 촉군이 퇴각한 뒤를 살펴보게 했다.
과연 등애의 추측대로 강유는 낙곡(駱谷)의 좁은 통로에
마른 풀과 장작을 쌓아놓고 추격대를 불태울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제장들은 모두
등애의 귀신같은 예측력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한편,
동오의 대장군 손침은 제갈탄에게 보냈던 전단, 전역, 당자 등이
모두 위나라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했다.
그리고 투항한 장수들의 가족을 모조리 잡아다 참수형에 처했다.
당시 오주 손량(吳主 孫亮)의 나이는 십육 세에 불과하였으나
총명하고 사리 분별에 밝았다.
그는 손침이 사람을 쉽게 죽이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손침이 대권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침의 동생 위원장군 손거(威遠將軍 孫據)는
창룡 금위대(蒼龍 禁衛隊)를 통솔하여 황궁에서 숙직하며 감시했고,
무위장군 손은(武衛將軍 孫恩), 편장군 손간(偏將軍 孫干),
장수교위 손개(長水校尉 孫闓)가 도성 각 수비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손침이 임명한 자들이어서 중앙의 병권이 모두
손침에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주 손량이 우울한 심사로 앉아있는데,
황문시랑 전기(黃門侍郞 全紀)가 오주를 찾아 왔다.
전기는 국구(國舅)로서, 황후 전씨의 오라버니되는 사람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자 손량은 눈물을 지으며 말한다.
"손침이 권세를 마구 휘둘러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짐을 업신여기니 해도 너무한 것 아니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필시 뒷날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오."
전기가 황제에게 아뢴다.
"폐하께서 신을 쓰시겠다 하시면
신은 만 번을 죽더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전기의 말을 듣고 손량은 기운이 솟는 듯 했다.
"그렇다면 경은 지금 즉시 금위대(禁衛隊)를 소집하여
유승(劉丞) 장군과 함께 각 성문을 장악하도록 하오.
짐이 손수 손침을 죽이겠소.
허나 결코 경의 어머니가 이 일을 알게 해서는 안 되오.
경의 어머니는 손침의 누이가 아니오?
이 일을 알게 되면 손침에게 짐의 계획이 흘러가
모든 것이 무위(無爲)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 큰 사달이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기를 바라오."
"폐하, 염려 마시옵소서.
신에게 조서를 써서 내려주시면 신이 그 문서를
무기로 삼아 손침 일당을 어전에 잡아다 무릎을 꿇리고 말겠습니다."
손량은 바로 밀서를 써서 전기에게 건넸다.
전기는 조서를 받아들고 집에 돌아왔다.
황제와의 약조에도 불구하고 전기는 참지 못하고
밀서의 내용을 아버지 전상(全尙)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전상은 손침 무리를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손침은 이제 죽은 목숨이오.
사흘 안에 그 무리가 죽어나갈 것이오."
전상은 그만 신이 나서
아내에게 손침 제거 계획을 말하고 말았다.
아내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몰래 손침에게 편지를 보내 그 일을 알려주었다.
누이의 밀서를 받은 손침은 그날 밤으로 아우 넷을 불러들인 다음,
정예병을 거느리고 전기와 유승의 집을 습격하여
그들의 가족을 모두 잡아들였다.
다음날 날이 밝아올 무렵,
오주 손량은 밖에서 크게 울리는 북소리와 징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때 환관이 급하게 달려들어와서 아뢴다.
"손침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궁궐을 포위했사옵니다!"
손량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으로 황후를 가리키며 호통쳤다.
"네 오라비와 아비가 큰 일을 그르쳤다!"
그러고는 칼을 뽑아들고 뛰쳐 나가려고 했다.
황후 전씨와 신하들이 황제의 옷깃을 붙잡고 통곡하며 만류했다.
손침은 벌써 전기, 전상 부자와 유승을 죽이고
문무백관들을 불러모아 명령한다.
"주상이 주색에 빠져 지내면서 오랫동안 병을 앓더니
이제는 정신까지 잘못되었는지 분별력을 잃었소.
그러고서야 종묘제사를 제대로 받들 수 있겠소?
그러하기에 손량을 폐위하고자 하니,
감히 손량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모두 역적으로 간주하고 엄히 다스리겠소!"
관원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대답한다.
"장군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고분고분 대답하는 관원 무리에서
상서 환이(尙書 桓彛)가 대뜸 나서서 손침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폐하께서는 총명한 군주이시다!
네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
네가 역적이 아니냐! 난 죽어도 역적놈의 말은 따르지 않겠다."
"뭣이야?"
손침은 크게 화를 내며 칼을 들고 환이를 바로 쳐죽였다.
그리고는 바로 내전으로 달려들어가
오주 손량에게 고함을 친다.
"무도하고 어리석은 군주를 당장에 죽여 천하에 사죄해야 마땅하나,
선제(先帝)의 얼굴을 보아 목숨은 살려주겠다.
황제의 자리에서 폐하고, 회계왕(會稽王)으로 삼을테니 옥새를 내놓아라.
내가 덕망 있는 군주를 모셔다 임금으로 세우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중서랑 이숭(中書郞 李崇)에게
황제의 인수(印綏)를 강제로 빼앗게 했다.
손량은 달리 손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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