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2)

오토산 2022. 5. 25. 07:36

삼국지(三國志) .. (414)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2)

등애는 계획을 적은 밀서를 한 통 작성하여 낙양의 사마소에게 사자를 보낸 후,
모든 장수를 장막으로 불러놓고 묻는다.

 

"나는 적의 허점을 노려 성도를 취하고 그대들과 더불어 큰 공을 세우고자 하는데,

나를 따르겠는가?"
모여 있는 장수들이 한 목소리가 되어 대답한다.

 

"만 번을 죽는다해도 마다하지 않고 군령을 따르겠습니다!"

 

등애는 장수들의 결연한 의지에 흐뭇해하며 명령을 내렸다.
먼저 맏아들 등충에게 정예군 오천을 주며 갑옷과 투구, 무거운 병기는

풀어놓게 하고 도끼와 곡괭이 등을 준비하도록 했다.

 

산세가 험하면 산을 뚫어 길을 내고,
물이 나오면 다리를 놓아 후속부대의 행군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 등애 자신은 전군(全軍)에서 군사 삼만 명을 선발하여

마른 식량과 굵은 밧줄을 휴대하게 하고 출동하였다. 
등애는 본영을 떠나 일백여 리쯤을 갔을 때 이끌고 온 군사 중

삼천을 다시 뽑아 그곳에 영채를 세워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또 일백여 리를 더 나아가서

다시 군사 삼천을 뽑아 영채를 세우게 했다.

 

겨울철에 접어든 10월,

음평에서 출발한 등애의 군사가 깎아지른 산,

험한 골짜기에 들어서기까지 대략 이십여 일이 걸렸다.

얼마나 깊고 험한 산골짜기인지 칠백여 리를 행군하는 동안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길을 오는 도중에 몇 군데에 영채를 세우고 군사들을 남겨두고 왔기 때문에

이제 등애의 수하에 남은 병력은 이천 명 남짓이었다.

군사들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묵묵히 등애를 따라 계속 전진했다.
이윽고 눈 앞에 높디 높은 고개가 하나 나타났다.

 

경사가 어찌나 심한지 도저히 말을 타고 넘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그 고개의 이름은 마천령(摩天嶺)이었다.
등애는 말에서 내려 고갯마루 위까지 걸어올라갔다.
고갯마루 위에서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앞서 떠났던 등충과

그의 군사들이 땅에 널부러져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길을 만들어 놓으라 했더니

왜 여기서 이러고들 있느냐?"
등애가 아들 등충에게 묻자 등충이 대답한다.

 

"이 고개 서쪽은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

도저히 길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군사들이 고생을 참고 길을 만들며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더 나아갈 방도가 없으니 지금까지의 수고가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것 같아 억울해서 그럽니다." 
등애가 말한다.

 

"우리가 지금껏 칠백 리를 넘게 행군해왔다.

여기만 통과하면 바로 강유(江油) 땅인데 여기서 돌아가자는 말이냐?"

아들에게 말하던 등애는 뒤를 돌아 모든 군사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도 않고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얻기를 바라겠는가[不入虎穴焉得虎子]!
내가 그대들과 여기까지 온 것은 기필코 성공하여 그 명예를 함께 누리기 위함이었다.

운명을 함께 하겠는가?"
등애의 말에 군사들은 마음을 다잡고 대답한다.

 

"장군과 함께 하겠습니다!"

등애가 군사들을 찬찬히 한 번 돌아보더니 곧 명령을 내린다.

 

"가지고 있는 무기를 모두 절벽 아래로 던져라!"

 

군사들은 곧장 등애의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등애는 보따리에서 털가죽옷을 꺼내 몸에 단단히 두르고 군사들을 향해,

 

"내 뒤를 따르라!"하고,

외치고는 절벽에서 몸을 굴려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뒤이어 등애의 용기에 감명받은 
나머지 군사들도 털가죽옷을 몸에 말고 절벽을 굴러갔다.
털가죽옷이 없는 군사들은 튼튼한 밧줄을 허리에 동여매고

절벽에 들쑥날쑥 나와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아가며 줄줄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생선 한 두릅이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이천의 등애군과 길을 개척하며 가던

등충의 군이 모두 마천령을 무사히 넘었다. 

 

고개 위에서 던졌던 무기들을 모두 챙겨서 가던 길을 계속 가려는데

길 옆으로 비석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군사들의 눈에 띄었다.
비석에 적힌 글자들이 군사들을 놀라게 했다.

二火初興  두 불*이 처음 일어나매 

(두 불[二火]은 '炎' 자를 풀어쓴 것으로,

촉 염흥(炎興) 원년을 상징함)

 

有人越此  이곳을 넘어오는 사람이 있으리
二士爭衡          두 선비가 서로 다투다가
不久自死          머지않아 스스로 죽으리

丞相 諸葛武侯 題  승상 제갈무후 씀
등애는 황망히 비석에 재배를 올리고 말한다.

 

"제갈무후께서는 참으로 신인(神人)이시다!

내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구나!"

 

등애는 은밀히 음평을 지나 계속 행군을 이어갔다.
그러던 도중 이번에는 썰렁하게 텅 빈 영채를 한 군데 발견했다.
등애가 향도관(嚮導官)에게 묻는다.

 

"이 영채는 누구의 것인가?"

 

"제가 알기로는 제갈무후께서 생전에

여기에 일천의 군사를 두어 지키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후께서 세상을 뜨시고 촉주 유선(蜀主 劉禪)이
이 영채를 폐지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등애는 경탄을 하며 주위의 군사들에게 말한다.

 

"이 영채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우리 군사가 여기서 떼죽음을 당할 뻔 했구나."
그리고 큰 소리로 엄명을 내린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온 길은 있으되 돌아갈 길은 없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강유성에는 곡식이 넘쳐난다.
전진만이 살 길이오, 물러서면 죽는다.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하라!"
모든 군사들이 힘차게 화답한다.

 

"죽을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군심을 다잡은 등애는 밤낮으로 행군하여

이틀 갈 길을 하루로 줄이며 강유성을 향해 갔다.

강유성을 지키고 있는 수비장 마막(馬邈)은 이미 동천(東川, 한중) 지역이

이미 위군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어력을 큰길에만 집중시키고 측면과 후방에 대한 경계는 소홀히 했다.

 

강유의 정예군이 검각을 철통 방어하고 있으므로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강유성은 위험에 처할 일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 귀가한 마막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내 이씨(李氏)와 함께 화롯불을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내 이씨가 마막에게 묻는다.

 

"변방의 형세가 매우 위급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장군께서는 왜 전혀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강유가 큰 일은 다 도맡고 있는데

내가 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렇지만 이 성을 지킬 임무를 맡고 있는데,

지금 장군께 그보다 더 중하게 생각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막이 한 쪽 입꼬리만 들어올려 콧방귀를 뀌더니 답한다.

 

"흥!

천자께서 환관 황호의 말만 들으시고

주색에 빠져 지내시니 변방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소?
내가 보건대 조만간 나라에 큰 화가 닥칠 것이오."
이씨가 침착한 어조로 남편에게 묻는다.

 

"그래서 장군께서는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마막은 고민의 기색이 없이 바로 대답한다.

 

"그럴 리가 있겠냐만

혹여 위군이 강유성에 들이닥치면 난 곧바로 투항할 생각이오.
그게 상책인데 지금부터 내가 미리 걱정할 게 무어란 말이요?"

 

남편의 대답을 들은 이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당황한 마막이 아내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씨는 남편을 쏘아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그친다.

 

"네가 지금껏 국록(國祿)을 축내는 쥐새끼 같은 놈이었구나!
나라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수가

환란이 닥치기도 전부터 불충불의(不忠不義)한 마음을 품고 있다니!
내가 어떻게 너 같은 놈과 한 자리에 앉아 있겠느냐?"

 

마막은 부끄러운 마음에

대꾸를 할 수도, 얼굴을 들 수도 없었다. 
그때, 하인이 급히 뛰어오더니 마막에게 고한다.

 

"큰일이 났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위군 장수 등애가

군사를 이천 명이나 거느리고 성 뒷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막이 크게 놀라 헐레벌떡 동헌(東軒)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공당(公堂) 아래에서

등애를 향해 절을 하고 엎드리더니 울며 고한다.

 

"소장은 오래 전부터 위나라에 항복할 생각이었습니다.
성안의 백성과 군사들을 불러다가

모두 장군께 항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등애는 마막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강유성의 병력을 모두 자군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마막은 향도관으로 삼았다.

 

등애가 한창 강유성의 군민을 위무하고 있는데,

마막의 아내 이씨가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등애는 마막을 불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유를 물었다.
마막은 아내와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고했다.

 

등애는 이씨의 덕행에 감동을 받아

예를 갖추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친히 영전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등애는 음평 샛길에 남겨두었던 군사들에게

전령을 보내서 강유성으로 집결시켰다.

삼만의 군사를 정돈한 등애는 바로 다음 목표인

부성(涪城)을 공략하러 길을 나서려 했다.
그때 부장 전속(副將 田續)이 건의한다.

 

"험한 곳을 진군하느라 군사들이 많이 지쳐 있습니다.
며칠을 쉬고 진격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전속의 말에 등애가 대로한다.

 

"군사작전은 신속성이 생명이다.
네가 군심을 어지럽히는 것이냐!
여봐라, 당장 이 놈을 잡아다 목을 쳐라!"

 

주변의 모든 장수들이

등애를 극구 말려서 전속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등애는 군사들을 휘몰아 곧장 부성을 공략했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등애의 군대에 놀란 부성 성안의 관리와 군민들은

위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아닌가 두려운 마음에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부성에 있던 군사 하나가

모두가 항복하는 틈에 몰래 빠져 나와 그 소식을 성도에 알렸다.

후주는 황호를 급히 불러 묻는다.

 

"강유성과 부성이 함락되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겠느냐?"
중상시 황호가 태연자약하게 대답한다.

 

"폐하, 그것은 꾸며낸 말이옵니다.
신령께서는 절대 폐하를 곤경에 처하게 두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황호의 말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은 후주는

당장 무당을 불러오라 명했다.
그러나 후주가 애타게 찾는 무당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조차 알 수 없었다.

 

후주가 기다리고 있던 무당에 대한 소식 대신 후주에게 날아든 여러 소식들은

후주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성도에서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후주 앞으로 급보와 급사를 보내왔다.
촉나라의 등불은 바람 앞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415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