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거경대학에서 고령 대가야왕릉전시관을 다녀와서

오토산 2024. 9. 28. 16:53

거경대학에서 고령 대가야왕릉전시관을 다녀와서

 

대가야박물관을 나와서 박물관 우측으로 능선을 오르니

잎은 꽃을 못 보고 꽃은 잎을 못 본다는 빨간 꽃무릇이 피어서

소나무가 서 있는 숲을 더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으며

우리는 언덕을 올라 대가야왕릉전시관을 찾았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무덤인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모습 그대로 실물크기로 재현해 놓았으며  관람객들이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령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주산의

남쪽능선위에는 대가야(42~562)가 성장하기 시작한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 만들어진 왕과 귀족들의 무덤 70여기가 있으며

오늘도 금림왕릉 발굴조사 고유제를 올렸다고 한다.

 

해설사님의 해설을 들으며

우리는 순장제도가 있었던 무덤을 돌아보았다.

 

말을 부리거나 말탄사람의 안정, 장식의 용도 등 대가야의 말갖춤은 

안쪽이 오목한 타원형의 판 모양의 재갈, 안장, 발걸이,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말방울, 기꽂이 등을 금이나 금동으로 화려하게 꾸미었고

전투용인 말갑옷과 말투구 등으로 말을 보호하기도 하였으며

대가야의 말갖춤은 일본에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고대사회의 옷차림은 형태와 색상, 옷감 등으로 신분을 구별하였고

대가야 사람들은 저고리와 바지 또는 겉옷인 두루마기(袍)를 입었으며

저고리의 옷깃이 곧은 것(直領)보다 둥근 것(團領)이 더 많이 입었고

왕과 왕비를 비롯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용과 봉황 물결과 타래무늬를 수 놓은 화려한 비단옷을 ,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삼베 등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대가야의 옷차림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한다.

 

대가야는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나라들과

다원적인 대외관계를 맺고 그 것을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라보다는 백제나 일본과 우로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낙동강이 신라에 의해 막히면서 교역로를 찾아 섬진강으로 진출하여

중국와 일본으로 교역하였고

지산동고분 44호의 금동그릇은 백제. 45호분의 세잎고리자른 큰칼은 신라,

야광조개국자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들어 온 것으로 대외활동을 알 수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하던 시기

가야는 독립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교류를 통해 문화를 공유하는

연맹국가를 형성하여 생활, 생산기술, 장례의식을 통해 정체성을 표현하고 

동질감을 나타내었다는 가야가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을 하였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변했을까를 생각해보면서 왕릉전시관을 나와

 

 뒷산을 올라 312호분 주변까지 산책을 하면서 고분을 구경하고  내려와

우리는 14:30 버스에 탑승하고 김면장군의 유적지 도암서원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