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문화

노량진의 사육신에 무덤은 왜7개인가(우받세/노라)

오토산 2014. 9. 19. 06:16

 

 

노량진의 사육신에 무덤은 왜7 개 인가 ?

 

노량진의 사육신에 무덤은 왜7 개 인가 ?

 

서울톡톡] 광진, 송파진,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은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혔다. 그 가운데 노량진은

상류의 한강진, 하류의 양화진과 더불어 한양도성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어서 이곳에는 진(鎭)이

 설치되어 군대가 주둔하였다. 노량진은 수양버들이

 울창해서 '노들나루'라고도 불렸다. 노들나루

노량진의 한강가 언덕배기에 사육신묘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한강대교

옆 노들나루 공원으로 들어서면 사육신묘 공원이 보인다.

사육신묘 역사관안에서 사육신이 일곱 분이 된 연유를 알게 됐다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6명의 신하들 사육신(死六臣).

그런데 이상하다. 사육신묘에 7기의 무덤이 보인다.

그럼 원래는 사육신이 아니라 '사칠신'이었던 것일까?

 사육신묘 공원과 공원 안에 있는 역사관에 갔다가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사육신묘 공원 입구의 홍살문, 왕릉이나 관아 앞에 서있는 붉은 문이다

왕릉이나 관아 앞에 서있는 붉은 홍살문이 사육신묘 공원

입구에도 높이 서있어 이채로웠다. 홍살문 아래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불이문(不二門)이다. 입구는 물론 사육신묘

 공원 곳곳은 벚나무, 잣나무, 버즘나무 등 나무들이 울창해서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에도 짙은 그늘이 있어 시원하다.

동네 주민들은 물론 인근 학원가에서 온 학생들의

휴식처로도 좋은 곳이었다. 옛 역사의 공간이자

후손들의 쉼터가 된 것이다.

사육신묘는 나무가 많은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쉼터 역할도 한다, 사육신비 맞은편에는 정조 때 세운 신도비각과 신도비가 있다

불이문을 지나 마주하는 곳은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다.

 불이문과 마찬가지로 사육신의 절개를 느끼게 하는 이름이 절로

엄숙함이 느껴진다. 매년 10월 9일에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불이문과 의절사 사이에는 좌우로 비석이 자리한다.

좌측은 정조 때 세운 신도비고 우측은 1955년에 세운 사육신비다.

 사육신들의 묘지는 의절사 뒤 고개 너머에 있다.

사육신묘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언덕인데

'아차고개'라는 재미난 이름이 붙었다.

아차고개에 어린 전설도 있다. 영등포에 살던 선비가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아차고개에 이르렀을 때 사육신이 죽음을 맞았다.

한 발 늦었구나 하는 '아차'하는 탄성이 그 고개의

이름이 됐다. 아마 오랜 세월 지나며 하나로 이어진

애도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의절사 너머 언덕배기에 있는 사육신묘

아차고개를 넘자 비로소 사육신묘가 보인다.

죽음으로 전한 이들의 충정 때문이었을까,

7기의 묘는 여느 무덤처럼 그저 가지런하지만

 마음을 정숙하고 정갈하게 하는 기운이 전해진다.

 사육신묘는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주변으로

수목이 풍성하고 넉넉한 산책로를 만들었다.

묘소에서 예를 올린 후에는 가볍게 공원의 자연을

 만나도 좋을 듯하다. 공원 산책로엔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한강 조망대도 있어 해저물녁에

 오면 멋진 강변 낙조도 볼 수 있겠다.

사육신 공원에는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조망대도 있다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개인이 지은 소설책 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왕실기록원

세조실록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김문기.로 기록되 있다.

이후 서울시가 1978년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그 결과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성삼문

·유응부·이개의 묘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를 새로 조성하였다.

 즉 7기 묘 가운데 넷이 진짜 묘이고 셋은 허묘(虛墓)다.

해설;왕조시대때는 왕실기록은 왕이라도 볼수없는 제도였기에

개인 남효온이 쓴 소설책만으로 사육신 정사가 일반에게 전해져 내려온것이다.

개인이쓴 소설책 내용이 사실처럼 전해져 오다가 나라가 왕권청치에서

 민주화 되면서 왕실기록 이조실록을 개봉하면서

그 모든 실체가 드러난것이다. 사육신에

주모자가 백촌 김문기 선생으로 밝혀진것이다 .

그래서 사육신에 백촌 김문기선생이 추가된것이다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육신 명단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김문기.

사육신묘 역사관 안에 있는 체험관

공원 안에 자리한 사육신묘 역사관에 들어가면 문화해설사를

통해 이 같은 역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역사관 2층엔

현장감이 담긴 음성과 영상으로 당시의

 사건과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똑같은 반란이라도 성공하면 반정이고 실패하면 역모가 된다.

 역적과 충신 또한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

조선 후기 사림파가 왕권을 능가하는 신권을

구축하면서 사육신은 비로소 충신의 대명사가 된다.

1456년 음력 6월 8일은 사육신의 충의가 핏빛으로 물든 날이다. 6월,

마음을 다하며 살다 생을 마감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려 봐도 좋을 듯싶다.

 

○ 위치 : 전철 1호선 노량진역 1번 출구, 9호선 노량진역

 2번 출구 및 노들역 1번 출구에서 5분 거리
○ 사육신 공원내 역사관 : 02-813-2130

(입장료 없음, 일요일과 월요일 휴무)
○ 사육신공원은 연중무휴 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