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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대가 격암남사고유적지

오토산 2014. 11. 24. 13:31

 

 

사진이 잘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7524

 

예언의대가 격암남사고유적지

울진은 생태문화관광도시로 계곡마다 물이있고 산마다 소나무가 울창하며

시원한 바닷가가 있어 어디를 가던지 관광지라 한다.

 

남사고는 1509년 근남면소곡리누금동 지금의 성황당에서 태어났다.

과거에서 매번 낙방한 남사고는 늙어서 울진 현령의 추천을 받아 사직단 참봉,

관상감 천문교수로 역임하였고 후세 사람들은 해동강절공이라 불러 추모했다.

 

 

어느날 밤하늘 별을보고 '오늘밤 이 시각에 일본서 영웅이 태어났는데 이아이가

자라서 반드시 우리나라에 처들어와 무수한 백성을 괴롭히게 될것이니 걱정이다'

라고 하였는데 들은사람이 기록한 일시가 임진왜란의 풍신수길과 일치했다.

 

중종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보우를 깊이 신임하여 보우의 횡포가 심할때 격암은

걱정하는 조정에'걱정마시오 내년에는 문정왕후가 돌아가시고 중 보우도 죽음을

면치 못할것이오'하더니 예언대로 되었고

 

또 동.서 당파싸움이 일어날 무렵 이조판서 권이서를 찾아 '대감 큰일났습니다

장차 큰병이 발생해서 수백년 동안 전염될것입니다 그병의 증세를 말하자면

안으로 썩는것은 내종같고 허는것은 당창같고 온 몸에 퍼지는것은 여주나역같고

아픈것은 치통같고 더러운것은 치질같고 정신없는것은 간질같고 파리모여드는것은

 눈병같고 뒷골아픈것은 임질같습니다'라고 하였고 권판서가 '어떻게 아시오?'하니

 

격암은 '그것은 우리나라의 운명입니다. 서울의 동쪽에는 낙봉이 있고 서쪽에는

안현이 있어 서로 다투는 형세이므로 반드시 동인과 서인이 당파싸움이 생길것

인데 낙은각마이므로 동인은 반듯시 분영한뒤에 각림할것이고 안은 혁이 안이니

서인은 반드시 개혁한 뒤에라야 편안할것입니다'라고 에언한것이 맞았다.

 

하루는 사직단에서 손님과 앉아 '자네 저기 좀 보게 오색이 영롱하고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 않은가? 저기가 덕흥군 저택인데 앞으로 성인이 나실

징조일세'라고 하더니 당시 생각도 못하던 덕흥군 셋째아들이 선조가되었다.

 

또 박록이란 친구와 소백산에 올라 동족을 바라보며 깜짝놀라면서 하는말이

'저기 동남족을 보게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 않은가? 저것은 임진년이나

계사년에 왜구가 쳐들어와 크게 난리를 일으킬 징조인데 만약 임진년에

난리가 일어나면 다시 나라를 구할 도리가 있지만 계사년에 일어나면 다시

구할도리가 없으니 큰일이 아닌가?'하니 박록은 '그렇다면 어디로 피난을

가면 살겠는가?'하니 '풍기와 영주가 피난처이네 마는 그전에 자네와 나는

이미 없을걸세'라고 하니 그 예언이 적중하였다.

 

또 하루는 관상감 이번신이 자기가 죽을날이 가까웠다고 하길래 격암은

'걱정하지 마십시요 죽을사람은 따로있소'라고 하였으나 이번실은

재상가들을 찾아 일일이 하직인사를 하고 있을 무렵 그 태사성의 빛이

영영사라지자 격암선생은 돌아가시고 말았다.1571.2.3.(63세)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곳으로 양택의 길지 설구(눈구멍)라 한다.

아버지 산소를 잘못써서 후손이 없고 풍수에 정통한 사람이 그럴수

있느냐는 비판도 있으며 아들이 없어서 세번을 산소를 옮겼다.

그 당시 격암선생이 앉아 쉬엇던것은 모두 산소로 변했으며

포항의 '호미곶'은 격암이 지은 이름이며 '격암유록'은 없고

'격암비록'만 있을뿐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들은말이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거짓말을 안한다'는

문화원장님의 재미있는 설명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원장님의 재미있고 상세한 설명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사 한마디

여인은 진리보다 애정에 산다.

맑은 거울과 같아서 살짝 입김만불어도 흐려진다.

애정으로 해맑고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라.

 

 

 

 

 

 

 

 

 

 

 

 

 

 

 

 

 

유물관은 현재 건축중이라서 구경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