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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탁선생이 휴양하던 사인암
하늘높이 치속은 기암정벽이 다른색갈의 비단으로 무늬를 편듯 독특한
색갈과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을 보면 해금강이 떠오른다는 풍경이라 한다.
조선 성종때 단양군수로 지냈던 임재광이 고려 후기 유학자 우탁이 이곳을 자주
찾고 사랑했다고 하여 그를 기리기위해 그가 지냈던 벼슬인 舍人에서 유래하여
이 바위를 사인암이라 불렀으며 추사 김정희가 하늘에서 내려온 한폭의 그림과
같다고 예찬할정도로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곳이다.
禹倬(1263~1342)은 고려후기 성리학자로 단양우씨 시조 禹玄의 7세손이며
1278(충렬왕4)에 향공전사가 되었고 1290(충렬왕16)에 문과급제하였으며
영해사록때 八鈴이라는 이름의 신사가 있었는데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을 극진히 받들고 자주 제사지내며 제물을 바쳐 피해가 막심했는데
그 팔령신을 요기로 단정하고 과감히 신사를 철폐시켰으며
1308년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간통하자 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持斧上蔬)을 한후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충선왕의 수차례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성균관좨주를 지냈다.
벼슬에 물러나 안동 예안에 은거하면서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역경의 정전이 처음들어왔을때 아는이가 없었다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며
역학에 조예가 깊고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뛰어난 역학자였기때문에 주역이 중국에서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易東선생으로 불렸으며 우리나라 시조의 중시조로도 불린다.
눈덮인 사인암과 청련암뒷편의 빙벽이 겨울의 정취를 더해 주었고
관광객들이 출렁다리를 출렁거리면서 즐기고 있었다.
사인암변에서 민박을 하려 하였으나 난방이 불가하다 하여
우리는 단양시내에서 숙박하며 시내관광을 즐겼다.
세상사 한마디
산통이란 대나무로 만들어진통으로 그속에 운세를 적은 산가지를
넣은후 산통을 흔들어서 쏟아 쏟아져 나온 산가지를 보고
운세를 알아보던 선조들의 운명감정도구이었다.
깨어지면 운세를 알아볼수없는 처지가 되기때문에 애통하게 여겼고
그것에 유래해서 계모임으로 몫돈을 마련하던시절 계가 깨어짐이
애통하여 삶에 희망을 잃었다는 뜻으로'산통이 다 깨졌다'고 하던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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