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선비 정도전에 대하여(이면동)

오토산 2015. 1. 14. 16:55

 

 

 

선비 정 도전에 대해

 

1. 선비 정도전의 가치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의 리더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즉 왕조시대에 국왕이 버려진 아이들이며, 관청에 소속된 여자노비까지 보살피고,
그들의 아픔마음까지 보듬어주고, 개선하려는 그 어진 마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를 질문하곤 합니다.

 

세종리더십 형성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부왕인 태종 이방원입니다.

하지만 태종에게서는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언행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정도전의 국가구상이 세종에 의해 거의 대부분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정도전의 리더십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왕과 신민들의 지배적인 정치 담론으로

회자되었고, 지금도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민본사상을 체계화시킨 정치사상가 였습니다.

민본사상이란 한 마디로

‘백성 우습게 알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생각’인데, 우리 한국인들의 언행 속에는

바로 이 민본사상이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들에 대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원형이자,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울리는 집요저음(basso ostinato)과
같은 한국형 리더십의 출발점으로 정도전을선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오늘날 조선왕조 500년의 설계자로 높이 평가 받고 있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숙명적 라이벌 이방원에게 척살된 이후, 무려 467년간이나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지내야 했습니다.

고종2년째인 1865년에야 대원군이 경복궁을 궁궐하면서 궁궐의 설계자라는 점을

 들어 그의 훈작을 회복하였으나  이미 그에게는 제사 지낼만한 후손도 없었고,

심지어 무덤조차 잃어버렸던 상황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정도전은 조선왕조를 창업하였으나 조선왕조는

그를 거의 500여 년 동안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훈작이 회복 된지 100여 년이 훨씬 지금 오늘 날 왜 사람들은

정도전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정도전이 구상했던 국가경영 방략(方略)의 탁월성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외할머니가 노비라는 세간의 수군거림과 10여 년 유배생활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 정도전의 인생역전의 드라마 때문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살펴볼 것은 정도전의 삶과 생각이 담겨 있는

그의 책 삼봉집입니다.

제가 정도전의 문집인 상봉집을 처음 폈을 때 받은 느낌은

잘 균형잡힌 국가경영의 청사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엔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이 수록되어 있는데,정도전은 이 책을 통해

조선왕조를 이끌어 갈 때  필요한 경영의 원리와 관제구조,

유교이념 등을 압축해서 종합해 놓았습니다.

조선경국전의 핵심어는 ‘경국’이라는 말인데, 국가경영의 사상인 경국의 덕목은

 민주화 이후 선진국의 문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다시 복원해볼 가치가 있는 용어라고 생각됩니다.

 

2) 밑바닥을 경험한 조선왕조의 설계자

“조선왕조의 설계자”

“한국인들의 민본사상을 체계화시킨 인물”

9년의 유배와 방황을 거치며, 극도의 좌절감을 경험한 사람고려 우왕 때(1375년),

나주 유배 :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 구설이 터무니없이 퍼져 화를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설계자이자, 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한국인들의 민본사상을 체계화시킨 정도전도 처음부터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9년여의 유배와 방황을 거치며 정신적 공황사태에 이르는 극도의 좌절감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유배지에서 주고 받은 아내의 편지였습니다.

고려 우왕 때인 1375년 그는 전라도 나주로 유배를 갑니다.

이 때 ‘비방이 벌 떼 처럼 일어나 구성이 터무니 없이 퍼져 화를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그 자신의 말처럼 온갖 참소와 비방이 그의 가족을 덮치자 아내는 두려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내의 절규가 담긴 편지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독서하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았지요. 한 톨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죠.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 나가면서도,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양명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가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 독한 장기나 마시고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패되고,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 <삼봉집> 권4, 가난

이에 대해 정도전은 다음과 같은 옹색한 답장을 보냈습니다.

정도전의 옹색한 답장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하는데둘 사이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소…”

그의 이러한 옹색하기 그지 없는 답장은 그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닥쳐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정도전은 거의 정신병 직전에까지 간듯합니다.

그가 쓴 도깨비에게 사과하는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신병 직전까지 가다.

울적한 생각에 마음이 혼란한데, 온갖 도깨비들이 서로 빈정대고 왔다 갔다하므로

너희들은 왜 여기 와서 나를 괴롭히느냐?

그러자 도깨비들은 이런 곳이야말로 도깨비가 사는 곳인데…
평상인 축에 끼지 못해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면모두 손을 저으며 돌아서곤 하는데,

우리들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그가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은 유배지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시작]

유배지에서 만난 늙은 농부가 말한 정도전의 죄목

“그 힘의 부족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 치기 좋아하고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 말 하기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 사람을 사모하며
아래에 처해서 위를 거스른 것이 그대의 죄목이로다!”

조광조도 유배 갈 때 정적 이사균에게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네 가지의 죄목을 범하고도 죽지 않고 귀양 와 있으니,나 같은 촌사람이 보아도

국가의 은택이 크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정도전은 나는 “광소공직”한 사람이었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광소공직 : 언행이 지나치게 거칠고, 미련할 정도로 밀어붙이는 사람)

정적이자 고향사람인 우현보와 스승 이색을 공격하는 일에 나서고 선배 정몽주마저 배척했던 것입니다.

 

[정도전이 찾은 “정치의 존재이유”]

무엇보다 그는 유배지에서 만난 무지렁이 백성들에게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해 타산을 떠나 어려운 사람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고,

보잘것 없는 나라의 은혜에도 감사할 줄 알고, 때와 상황에 맞고 말하고

이치에 맞게 행동할 줄 아는 그들에게서 그는 드러나지 않는 은둔자.

즉, 숨은 군자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정도전은 “나는 대대로 농사짓는 사람으로 태어나 밭을 갈아 국가에 세금을 내고

나머지로 처자를  양육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네”라는

늙은 농부의 말을 들으면서 정치의 존재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궁벽진 산골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도 정치가 잘 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귀신 같이

꿰뚫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이 떠나는 순간 국가도 사직도 곧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정도전이 리더에게 던지는 화두]

큰 산은 깊은 골을 가지고 있고, 바닥인생을 잘 극복해 낸 지도자야말로

울림을 주는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정도전의 삶을 보며 리더가 가져야 하는
도전과 고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