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선비정신(이면동)

오토산 2015. 2. 6. 09:22

 

 

우리민족이 지켜온 고유의 선비정신은 죽고 지금의 선비정신은 변질된 상태다.

선비에 대한 글을 접하고 신라 박제상(朴提上)을 생각합니다.

선비란 모름지기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살리며 이로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마음가짐을 갖인 자의 지혜와 용기를 가춘 사람의

자세입니다.

선비를 적게는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단어로

인식되어있습니다만, 원래 선비는 단군의 이념인 홍익인간과 실사구시를 실천하던

 젊은 학자들로써 문무를 겸했던 고학력출신자들을 말 합니다.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이지만

"선비"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민족 고유의 말입니다..

우리말의 '선비'는 단군의 주신(=몽골어와도 같은 표현)을 어원으로

"뜻이 깊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주신시대에서-고구려시대까지의 선비는

실사구시,홍익인간의 이념을 실현하는 사회지도층들이었지만 이조시대들어

이 선비가 왜곡되어 변태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를 좀더 설명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자의 '사'는 '사'(仕 : 벼슬하다)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데

본래 '사'는 주대(周代)의 봉건사회에서 하급관리에 속하는 계급이었으나,

춘추시대부터 '사'의 인격적 측면이 강조되었고.

'사'는 신분적 의미에서 대부와 결합하여 '사대부'(士大夫)라 일컬어졌으며, 인격적

의미에서 군자와 결합시켜 '사군자'(士君子)로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어원의 변질이 마침내 우리민족의 선비정신까지 중국의 주나라 사대부와같은 의미로 변질되고 말았으며 유학를 주된 교육방침으로장한 이성계의 조선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우림녹의 고유한 선비의 정신마저 중국의 사대부와같은 뜻으로 부회(附誨)되고 말았으며 우리민족의 선비는 모두 죽고 말앗던 것입니다.

유학을 주로하는 가르침에서의 사대부에 대한 해석을 빌려서 봅시다.

사대부는 즉 '유'(儒)와 같은 뜻으로 유교이념을 실현시키는 인격을 의미합니다.

 

한편 '사'는 독서로 학문을 연마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농·공·상의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서민들과 병칭되어 사민(四民 : 士·農·工·商)의 첫머리에

놓임으로써 가장 존중받는 대상이 됩니다.

선비의 존재나 의미는 주신을 계승한 고구려때까지와 이조때와는 전혀 다른데

을지문덕의 후손인 을파소에 대한 전언을 소개하자면, 2세기 말엽,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는 재상으로 부름을 받자,

"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 " 라고함으로써

"선비의 나가고 물러서는 도리" 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주신시대와 고구려시대는 큰학(汗學), 태학(太學)등 전문교육기관을 두어 인재를 가르치면서 선비를 배양하는 것을 제도에 따라 시행했었습니다.

후 고려 때에는 한층 더 강화하여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를 병행하면서 선비들을 관직으로 직접유입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요.

고려 말엽 안향(安珦) 등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이 도입된 뒤에 선비의 자각이 심화되었으나, 이성계에 의해 졸지에 고려가 멸망하고 이씨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유교이념을 통치원리로 삼아 전주이씨정권을 유지하기위한 수단으로 선비이념을 유교이념으로 전환하면서 유교이념의 실천적 담당자로 활용하였습니다.

이조 초 사림파(士林派)는 도학이념을 수련하고 실천을 주창했고.

이에 반해 훈구파(勳舊派)가 사림파를 과격한 이상주의자로 배척하여 억압하자, 사화(士禍)가 일어나 사림파의 선비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조선의 선조때를 전후하여 선비들이 정치와 문화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해 조선시대를 이끌어 갔는바,

이조말(한말)에 이르러 도학이 다시 활기를 찾으면서 선비정신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어갔는데 한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선비들은 당시에 전파되던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서양의 세력을 오랑캐로 거부하면서, 이조만을 위해 본격적인 쇄국정책에 찬동하여 이질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도학의 정통성과 이조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1876년 개항 이후 이조정권이 개화정책을 취하게 되자 이조말 유학자들은 정부의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는데 특히,

유중교(柳重敎)는

"선비란 조정에서 아무 것도 받은 바가 없을지라도 그의 자리는 천위(天位)요, 그의 임무는 천직(天職)이다"라 하여,

천명에 따르는 선비의 지위와 직책을 내세워 군주의 세속적 권력을 넘어설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왕권에 지배되지 않는 선비의 지조와, 왕명이 부당할 때는 거부할 수 있는 선비의 천직을 강조함으로써 이조시대의 이념(사농공상,중화사상,반일주의)을 옹위했습니다.

일본의 공격에 반항해 의병을 주도하면서 선비의 저항정신을 내세웠던 유인석(柳麟錫)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선비의 대처방법으로,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를 쓸어내는 일'(擧義掃淸),

'멀리 떠나서 옛 제도를 지키는 일'(去之守舊),

'죽음으로써 지조를 온전히 하는 일'(到命遂志)의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만 이는 이조시대위주의 의식만을 근본으로하고 있었기때문에 곧 소멸되고 맙니다.

주신시대는 각지 배달을 주로 임하여 5대주로 향해 각지에 주신의 문화와 유적을 주로 남겼고 구려시대 역시 매우 엄격한 규범을 지니고 성장한 선비들은 관직에 나가면 임금을 도와 정치를 담당하고,

물러나 산림에 은거하여도 도(道)를 강론하여 세상의 미래를 밝히고 실천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국리민복의 긍극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일평생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조시대들어서는 사(士)로

이름되어 중화사상인 유교적 도덕규범을 실천하는 모범으로서 이조정권을 유지 계승하는 목적으로 교육되고 실행되어 대중들을 교화하고,사회적 운영을 하여 철저하게 그렇게 존재되다가 일제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적으로 볼때, 선비가 지향하는 본질적 의미는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뿌리한 '의리'(義)입니다.

따라서 선비정신은 곧 信과 義 정신으로 나타납니다.

때문에 고려말에서 이조로 전환하는 한민족역사의 왕조 교체기에 있던 선비들 사이에는 고려 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킨다는 정몽주 등과 '혁명'의 당위성에 따라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상반된 입장이 충돌했는데 이조정권은 이들을 모조리 살륙함으로써 정권을 세웁니다.

특히 이성계의 왕조전복과 이방원의 형제살륙등을 합리와 시키려는 논리는 이성계조선의 초기 유교논리를 말살했고 선비들은 모두 산중으로 들어가고 말앗습니다.

일부,이성계조선 세종 때에 이조식 선비인 사가 새로이 성립되어 이조선비로써 세조의 왕위찬탈에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고,

절의보다 이조정권에 의리로서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를 제기하며, 도학적 의리의 가장 큰 과제는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여 이단을 배척하고, 중화와 오랑캐를 가려서 중화문화를 수호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러한 중화문화의 존숭은 사대주의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슴에도 이조의 개국이념이 이소역대

즉, '춘추대의'이기때문에 변질적으로 중국이외에 대한 외민족에 대해서만 작동하여 려진이나 왜인등에 대해서는 천하다하여 침략자, 오랑캐로 규정하고 항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만 그 행동의 편향성으로 원칙이나 사리에 맞지않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곧 소멸되게 됩니다.

임진왜란을 막지도 못하고 왜란이 터지자 잠깐 활동하다 말았고, 병자호란 때에도 이를 미리 막지 못하고 척화론(斥和論)만 주창하다가 팔기군이 공격해오자 모두 도망쳤으며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항복하는 전대미문의 치욕을 당하자 만주족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 의식만 가득하다가 곧 사그러들고 마는 이 시대 선비들의 정신이란 금력돠 권력을 쫓아다니며 말재주만 피우는 오늘날 학계풍조와 다를바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조시대 선비들은 겉으로는 선비의 품격과 지조를 철저히 주창했고,

조광조(趙光祖)는 선비란
"자신을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며, 일을 당해서는 과감히 실행하고 환난을 헤아리지 않는다"라고 하고,

소인이란 "감히 저항하는 지조와 곧은 말로 원망과 노여움을 부르지 못하며, 머리를 숙여 아래위를 살피고 이쪽 저쪽을 주선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자"라고 하여 선비(군자)와 소인을 엄격하게 분별했다.

이황(李滉)은 "선비는 천자와 벗하여도 참람하지 않고, 왕이나 공경(公卿)으로서 빈곤한 선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다"라고 하여,

절의 있고 당당한 선비의 고귀함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이이(李珥)는
"사림(士林)이 조정에 있어서 사업을 베풀면 나라가 다스려지나, 사림이 조정에 못 있고 공허한 말을 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라고 하여,

선비가 국가를 바르게 다스리는 주체임을 강조했으나 위의 인물중에 조광조와 퇴계 ,율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늬만 선비였다는 후대의 평가는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합니다.

선비정신의 재정립이 필요합니다.

선비는 이조시대들어 완전히 변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비란 그 사회의 지성인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를 의미할 수 있으므로.

전통 선비의 이념을 되살려 현재처럼 세속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더욱 높은 이상을 지향하는 가치의식을 지니며,

신념의 실천을 위해 꺾이지 않는 용기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난역사에 대한 통절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비판할 줄 아는 성찰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분열에서 화합,통합하고 조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할수있도록 초,중,고,대학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세워 교육할수 있어야 합니다.

선비는 이제 더이상 이조시대처럼 신분적 출세적, 권력,기득권층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인격체로 다시 세워져미래의 밝은 사회를 이끌수 있도록 해야 할것입니다.

"선비"라는 이름앞에 무엇을 더 붙이고 때고 할것이 있을가요?

"선비"에게 특별히 만든 유니폼으로 멋들어지게 장식할까요?

"선비"에게 고래등같은 기와집이나 빌딩에 재물을 갖춰야 할까요?

목숨이나 아끼는 "선비"가 있다면 그에게는 "좀비"라는 이름으로 다시불러야 할것입니다.

자신과 소속한 종족과 단체의 존재에 집착하여 조상의 비석이나 지키고 조상이 물려주었다믄 지체만 내세우면서 보다

큰 민족의 대의를 저버린 그런 "선비"의 후손들이 있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굴욕과 부그러움으로 외양만 호도하려는 무리들이 반도삼천리강토 골골마다 숨어 사는 자들이 그 얼마이뇨?

이들은 그 못된 만행으로도 모자라 세력을 엎고 "선비"라는 탈을 쓰고 은근히 민족을 해치는 일을 서슴치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여 민족정신을 해치는 일은 그 얼마였던고?

고래등만큼 큰 기와집이라도 하늘을 치솟는 빌딩속이라도 반도 강산 산골어디에 숨더라도 민족이 위기에 처하여있는 지금 그 화근을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임진왜란같은 병화 다시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방어하는 일에는 소흘하면서 방방곡곡 깊히 깊히 숨어든 그 당시 임기응변으로 대처한 우리조상들의 어설픈 지혜를 오늘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아간 쟁쟁한 선비의 후손도 있었으며 부적을 찾아 산속 깊히 은거한 흔적도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 쯤은 모두들 깨달아야 할 것이외다.

이제 이민족은 백척 높은 장대위에 고추서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할 위기를 맞이하여 있는 이때에 선비가 멋이나 재물에 현혹되어 몸을 사리고 용기를 주저 한다면 그를 두고 "진정한 선비"라고 이름지어둘 수 있을까요?

항차 선비를 말함에 있어 옛날 신라의 박제상같은 이는 왕자를 대신하여 인질로 남았다가 탈출하면서 목숨을 잃은 이야기도 있는데 이들이야 말로

"그 아까운 한목숨 을 기꺼히 바쳐서 더욱 훌륭한 목적을 이룩할 수 있는 본받을 선비의 임무를 이루었다"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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