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겸(謙) [ㅡ, 地山謙] 겸양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강한자만이 겸양할 수 있다.
겸양은 군자도 인격수양을 완성했을 때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잘 익은 벼라야 고개를 숙일 수 있다.
한편, 진정한 겸양은 무조건 베풀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대의를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무력을 써서라도 응징하는 것이 겸양의 참모습이다.
謙 亨 君子 有終
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鳴謙 貞 吉
勞謙 君子 有終 吉
无不利 撝謙
不富以其隣 利用侵伐 无不利
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겸(謙, 겸양)의 도리는 어려서부터 잇혀야 하고, 군자도 마지막에야 이를 완성한다.
겸겸(謙謙)의 도를 이룬 군자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이를 이겨내니 길하다.
명겸(鳴謙)의 도를 행하면 결국 길하다.
로겸(勞謙)의 도를 이룬 군자는 끝내는 뜻을 이루니 길하다.
휘겸(撝謙)의 도를 행하면 불리함이 없다.
겸은 무조건의 용서가 아니다.
대의를 그르치는 자에 대해서는 징벌을 해야 불리함이 없다.
명겸(鳴謙)의 도는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징벌하기도 한다.
謙 亨 君子 有終 (겸 형 군자 유종)
겸(謙)은 겸손(謙遜)이요 겸양(謙양)이다. 이 겸의 도는 어려서부터(亨) 익히고 수행하여 군자(君子)가 마지막(終)에 갖추는(有) 덕목이다. 군자의 미덕은 겸에서 일어나며, 군자는 겸양에서 인격의 꽃을 피운다. 군자의 마지막 공부이며 수행의 마지막 단계라 하겠다.
謙謙 君子 用涉大川 吉 (겸겸 군자 용섭대천 길)
겸겸(謙謙)은 겸도(謙道)의 중복이니 최고의 겸양이다. 이 경지에 도달한 군자는 사고와 행동이 언제나 일치해서 어떤 일을 도모해도 이룰 수 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냉철함과 이에 대처할 만한 지혜를 동시에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래서 큰 내를 건너는 것처럼 일견 무모해 보이는 위대한 일도 해 낼 수 있으니(用涉大川), 이로써 吉하다고 했다.
鳴謙 貞 吉 (명겸 정길)
명겸(鳴謙)은 끝내는(貞) 吉하다는 말이다. 명겸이란 현실세계에서 특히 변론이나 연설, 대인관계에서 謙의 道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현실 생활속에서 겸양의 도리를 다하면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갈 수 있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상이 변화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처세할 수 있다.
명겸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이미 적절한 처세의 도를 깨우친 사람이며, 때로는 목적을 위해 거짓을 행하기도 하고, 화려한 연설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잔재주가 아니라 겸양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을 하니 길할 수 있다.
勞謙 君子 有終 吉 (노겸 군자 유종 길)
로겸(勞謙)은 사람이 노력을 통해 얻는 겸양의 도리이다. 천부적으로 군자의 품성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謙의 道를 깨닫은(困而知之) 군자가 바로 勞謙 군자이다. 이렇게 학문과 겸양으로 인격을 완성한 군자가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니 역시 길하다.
无不利 撝謙 (무불리 휘겸)
휘겸(撝謙)도 불리할 것이 없다(无)는 말이다. 휘겸이란 생각과 행동이 이 세상에 걸릴 것이 없이 자유로우면서도 겸도(謙道)를 깨달아 누구에게도 폐가 되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아무런 욕심이 없이 겸의 도를 행하니 불리함이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不富以其隣 利用侵伐 无不利 (불부이기린 이용침벌 무불리)
이상에서 네 가지 謙의 형태를 살펴보았거니와 이 가운데 <주역>이 주목하는 현실 정치의 세계에서 단연 필요한 겸손은 명겸(鳴謙)이라 할 것이다. 이 구절과 다음 구절은 이 명겸에 대해 실례를 들어 부연한 설명이다.
불부이기린(不富以其隣)은 이웃과 더불어 부를 누리지 않는다는 말이니, 이웃의 부를 탐내는 것, 도적질하는 것, 질서와 평화를 깨는 것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명겸의 입장에서는 타도의 대상이자 응징의 대상이다. 그래서 침략하여 응징해도(利用侵伐) 불리할 것이 없다(无不利)고 하였다.
<주역>이 강조하는 겸손은 이렇게 질서와 평화 공존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힘과 실력을 갖춘 실력자의 겸손이다. 힘이 없고 무지해서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 현실이 허무하다고 도피하는 것은 <주역>스타일의 겸손이 아니다. 옳은 것은 지키고 그른 것은 힘으로라도 바로잡는 것이 <주역>이 강조하는 진정한 겸양의 모습인 것이다.
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명겸 리용행사 정읍국)
리용침벌(利用侵伐)을 국가 단위로 확대한 것이 리용행사(利用行師)이다. 군사를 일으켜 자기 나라를 넘보는 이웃 나라를 정벌하는 것(征邑國)이며, 국가간의 평화를 깨는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명겸(鳴謙)의 도에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 힘의 정치는 명겸의 역할이라는 것이 <주역>의 마지막 교훈이다. 왼쪽 뺨을 때리거든 오른쪽 뺨도 내밀라는 종교적 가르침과는 상단한 거리가 있는 <주역>만의 현실적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