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관(觀) [ㅡ, 風地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정관을 얻는 지혜
세상에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관상을 보는 사람,
미래를 보는 사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
하지만 그들도 정작 자신의 마은과 미래는 알지 못한다.
정관(正觀)의 도(道)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童觀 小人 无咎 君子 吝
闚觀 利女貞
觀我生 進退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觀我生 君子 无咎
觀其生 君子 无咎
심신이 깨끗하여 동요가 없고, 믿음과 공정함이 있으면 觀의 道를 얻을 수 있다.
아이와 같은 어리석은 눈을 소인이 가진다면 허물이라 할 수는 없으나, 군자라면 옹색하다.
얼핏 훔쳐보는 것은 여인이 리(利)에서 정(貞)의 시절까지 하는 짓이다.
스스로 자신을 알면 진퇴를 정 할 수 있고,
나라의 미래를 보는 경륜이 있으면 왕으로부터 빈객의 예우를 받는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과 사물을 보는 도리를 깨달아야 허물이 없다.
觀 盥而不薦 有孚顒若 (관 관이불천 유부옹약)
觀의 道는 관이불천(盥而不薦)과 유부옹약(有孚顒若)으로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관이불천(盥而不薦)의 盥은 몸을 씻는다는 말이니, 목욕재계를 통한 몸과 마음의 정화이다. 불천(不薦)은 그렇게 씻어낸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니, 부동(不動)의 자세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어떤 외풍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 이것이 관이불천이다.
유부(有孚)는 앞서 여러 번 나온 바대로 믿음과 신뢰이며, 옹약(顒若)은 공경과 겸손이다. 그렇다면 누구에 대한 믿음과 공약인가? 바로 觀의 道를 주재하는 자에 대한 믿음과 공경이다. 그렇다면 누가 관의 도를 주재하는가? 하느님인가 부처님인가? 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부돈심을 연마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관의 도를 주재하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 된다.
다른 신적 존재를 상정해도 해석의 흐름에 있어 무리는 없다. 단지 바로 그 신에 대한 믿음과 공경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관의 도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그런 나를 도와 주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공경이라고 복합적으로 해석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믿음과 공경의 자세일 것이다.
한편 觀은 견(見, 보다)과 다른 것이다. 견은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관은 생각을 현상의 이면과 사태의 미래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하는 관광(觀光)은 그냥 보이는 대로의 풍광(風光)을 구경하는 것이다. 그 풍광과 유물들이 말없이 전하는 어떤 말을 고요히 듣고 색각하는 것이다.
童觀 小人 无咎 君子 吝 (동관 소인 무구 군자 린)
아이들에게도 보는 눈이 있고 생각이 있다. 이것이 동관(童觀)이다. 어린 아이 시절에 세상을 순수하고 단순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너무나 되바라진 요즘의 아이들을 볼 때면 차라리 권장하고 싶은 자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시선을 갖는 것이야 무슨 큰 허물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 <주역>의 생각이다. 그래서 소인의 동관은 별 허물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을 경영해야 할 군자가 이런 동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같은 童觀이라도 소인은 괜찮지만 군자는 막히고 옹색하다(吝)고 한 것이다.
여기서 <주역>의 성격에 대해 한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기본적으로 <주역>의 관심 대상은 임금, 정치가, 학자, 사업가 등 소위 성공한 사회적 리더들이라는 사실이다. <주역>에서는 아이와 여자, 소시민의 문제도 자주 언급하지만 이들이 권장해야 할 삶의 표본으로 제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목표와 지향점으로 제시되는 것은 언제나 군자요 리더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역>은 위대한 통치와 남다른 부의 성취, 학문의 달성을 촉구하고 그 비결을 제시한 일종의 성공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주역>은 이런 성공과 성취, 진취적인 삶의 태도 자체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사람들, 수천 년 전에 엄존했던 남성 우월주의를 아예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는 다소 불편한 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지혜들이 숨어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주역>은 그만큼 방대한 대상의 책이다.
闚觀 利女貞 (규관 리여정)
동관(童觀)이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면, 규관(闚觀, 엿봄. 훔쳐 봄)은 여자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물론 여자들도 아이 때에는 동관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규관은 여자들의 세계관이되,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숙한 여자들조차도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경계해야 할 세계관이되, 여자(女)들은 어쩔 수 없이 利에서 貞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이런 시선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주역>의 생각이다. 오늘날 여자분들로부터 불매(不買) 혹은 부독서(不讀書)로 몰릴 딱 좋은 구절이다.
觀我生 進退 (관아생 진퇴)
觀의 지혜, 혹은 관의 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가 관아생(觀我生)이다. 관아생은 자기(我生)를 본다(觀)는 말이니,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확실히 아록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나아가고(進) 물러날(退) 바를 또한 능히 알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끝없는 질문의 최종 결과가 비로 '觀我生'의 경지일 것이고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과 다를 것이 없는 가르침이다.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관국지광 리용빈우왕)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라의 영광(國之光)을 보는(觀) 경륜이 있으니 왕으로부터(于王) 빈객의 예우를 받는다(利用賓)는 말이다. 세상의 흐름과 국가으 경영의 도를 알고 국운을 번영케 할 경륜과 능력이 있다면, 왕으로부터 큰 대접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관국(觀國)을 논한 이 구절은 정치인에게 필요한 觀의 지혜를 말한 것으로 일단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관국의 범위를 좀더 넓혀 보면 가정이나 회사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향후 추이를 미리 알아보는 능력을 관국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觀我生 君子 无咎 (관아생 군자 무구)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그리고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제대로 보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퇴(進退)를 결정할 수 있는 통찰력으로 풀이했던 관아생(觀我生)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경지에 이른 君子는 허물이 없다고 하였으니. 자신의 사사로운 진퇴뿐만 아니라 저잋며 경젱의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더라도 허물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觀其生 君子 无咎 (관기생 군자 무구)
觀我生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이라면, 관기생(觀其生)은 타인과 사물에 대한 통찰이다. 그 도리를 깨달은 君子 역시 허물이 없다고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가르침이요, 상대와 사물에 대한 이해라는 동양적 가치관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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