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관(正觀), 나와 상대를 알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는 지혜
<관(觀)>은 보는 지혜에 대한 장이다. '본다'는 말에는 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의 특성을 파악한다는 뜻도 있지만 읽는다, 알아챈다, 헤아린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상대와 나를 알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확히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觀의 道요, 正觀의 지혜이다.
正觀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은 어떤 걸림도 없이 살 수 있으며, 학문을 추구하지 않아도 지혜가 생기고, 굳이 이익을 탐하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으며, 인간관계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진실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이보다 더 큰 생활의 道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觀의 道이다. 이 도를 깨우치면 또한 세상만물의 근원과 만사의 움직이는 원리를 모두 알 수 있게 되니. 굳이 점을 치지 않아도 미래를 볼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가야할 길과 삶의 방향을 잃지 않게 된다. 그야말로 그칠 것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욕심이 나는 비결이지 않은가?
<주역>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길흉화복의 예언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야할 길을 잃지 않는 인생의 지혜,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이를 타개하고 전진할 수 있는 삶의 지혜, 바로 그런 지혜를 전해 주고자 <주역>이 저술된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주역>에서 정말로 미래를 위한 변치 않는 길(道)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점쟁이의 도움을 받아 일시적으로 난관을 타개할 방책을 얻어들을 수는 있겠으나, 이는 문자 그대로 일시적이고도 모호한 방책에 지나지 않는다. 한번 이런 일에 얽매이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그 방책이 실제 상황에 맞지 않을 때에는 그나마 방책으로서의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점쟁이가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가장 합리적이고도 구체적인 해결의 방도를 찾게 될 것이다.
<주역>이 제시하는 삶의 길은 여타의 동양 철학서들이 가르치는 보편적인 도덕률과는 다르다. <주역>은 물론 심오한 청학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거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식의 고루한 잔소리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타개책을 써야 역전 시킬 수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책이 바로 <주역>인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正觀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주역>에서는 관이불천(盥而不薦), 유부옹약(有孚顒若)의 수행을 하면 觀의 道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관이불천이란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 오욕(五慾)을 정리한 상태, 그래서 모모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르바 부동심(不動心)이다. 한편, 유부(有孚)는 믿음이요 옹약(顒若)은 공경이니, 유부옹약은 나자신에 대한 믿음과 觀의 道를 주재하는 자의 공경이다. 이 두 가지를 갈고 닦아야 정관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수련과 공부를 거쳐 얻게 되는 觀의 지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무엇을 얻고자 이런 수행을 해야 하는가?
<주역>은 우선 권장해야 할 세 가지 관의 지혜를 말했는데, 관아생(觀我生), 관국지광(觀國之光), 관기생(觀其生)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관국지광은 나라의 미래를 보는 눈, 나라의 나아가 방향을 보는 눈을 말한 것이어서 일차적으로 정치인에게 필요한 觀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뜻을 좀 더 넓게 해석한다면 어떤 일이나 사태으 정황을 보는 눈, 그런 지혜로 읽어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국(國)을 나라가 아니라 형국(形局)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관아생(觀我生)과 관기생(觀其生)은 또 각각 자신을 보는 지혜, 상대를 보는 지혜를 말한다.
이와 같이 나를 알고 남을 알고 상황을 아는 세 가지 눈만 갖추면,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아갈 바를 찾을 수 있고 취해야 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주역>은 또한 경계해야 할 두 가지 관(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동관(童觀)과 규관(闚觀)이 그것이다. 동관은 어리아이가 보는 것처럼 보는 것, 즉 어린아이들이 사물을 보는 방식을 말한다. 순수해서 좋긴 하지만 어른들이 취할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 <주역>의 설명이다. 규관은 대강 스치듯이 보는 것, 몰래 훔쳐보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이런 觀으로는 결코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주역>에 따르면 규관은 여자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자 여자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주역>의 남성 중심 사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