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종손.종택과 시호와 불천위(이면동)

오토산 2015. 6. 27. 00:27

 

宗孫(종손), 宗宅(종택)과 諡號(시호)와 不遷位(불천위)에 대해

1. 吉祭
吉祭는 ‘吉祀’라고도 하며 제사 가운데 유일하게 즐겁게 지내는 제사며,

 그 만큼 요즘엔 보기가 어렵다.

祭祀에는 돌아가신 밤에 지내는 忌祭, 철따라 지내는 時祭,

墓所 앞에서 지내는 墓祭가 있는데 길제는 전혀 다른 祭禮 중 하나다.
쉽게 설명하면 길제는 ‘宗孫, 宗婦 취임식’이다.

종손은 단순히 그냥 넘겨받는 게 아니라 새 종손, 종부를 결정해야 하며,

사실 결정돼 있지만 취임식이 있어야 한다.
그 취임식이 길제며 자손 모두의 관심사다.

자연 이날은 많은 자손들의 참여 속에, 姻戚 관계에 있는 자손들의 많은 참여 속에

 이뤄진다.

경비는 대부분 문중에서 감당하니 길제는 문중의 큰 축제다.
이 길제를 통해 문중의 정체성과 긍지,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의미 있는 儀式이다.
정체성 문제는 개인, 단체, 지역, 나라 등 어떤 개체들도 피할 수없는 인간욕구의

 궁극적 과제다.

宗婦는 길제의 꽃이다.
족두리에 원삼을 곱게 차려입고 부축을 받아 祠堂에 나아가 절을 하는데

이 의식이 길사의 大尾다.

이런 절차에 따라 ‘不遷位 先祖’를 비롯한 고조, 증조, 조부, 부모의 位牌에

 ‘奉祀孫00奉祀’라 쓰면 종손, 종부가 된다.

이로부터 呼稱에 걸맞게 그 고유한 업무(奉祀)에 돌입하며, 비로소 종손이 되고

 종부가 되는 것이다.

 

2. 宗宅(宗孫)은 家門의 象徵
종손, 종부가 사는 곳을 종택이라 하며 그 연원은 어떻게 비롯되었나.
왜?, 무엇이 명문가를 자처하는 가문은 종택(종손, 종부)의 전통을

그토록 지키려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를 지켜온 사람들은 누굴까?
한마디로 종택 문화는 훌륭한 선대 인물을 기리고 그 인물을 본받고자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선대 인물은 누구인가?

 

3. 諡號와 不遷位

우리나라 역사에서 훌륭한 인물은 諡號와 맞물려있다.

시호이외엔 다른 훌륭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없다.
훌륭한 사람이 죽으면 시호 논의가 일어나고 시호가 내리면 국가적 인물로 공식

 승인된다. 주무 부처는 ‘奉常寺’란 기관이다.

우선 인물이 죽으면 일대기를 짓는다.

집안 차원에서 짓는 글이 ‘家狀(혹은 遺事)’이고 가장은 ‘行狀’의 기초가 된다.

가장은 草稿이고 행장은 완성된 글이며, 가장은 집안사람이 쓰지만

행장은 그렇지 않고 ‘공식 일대기’이기에, 당대 문장가에게 부탁한다.

시호를 받기 위한 글인 諡狀의 기본 자료가 행장이다.

시호를 받기위한 공적 詔書가 시장인데 시장은 행장을 기초로 하며,

행장도 그렇지만 시장 또한 절대 허위, 과장되어선 안 된다.

시호는 압축되고 정밀한 의미가 부여된 文, 武, 貞, 恭, 襄, 孝, 莊, 敬, 翼, 安 등

120여가지의 글자를 상호 조합해 짓는다.

가령 ‘翼’자는 思慮深遠(사려가심원하다), ‘貞’자는 淸白守節(청백하며 절개를 지켰다), ‘襄’자는 因事有功(특정한 국사에 공이 있다), ‘忠’자는 危身奉上(위기에 몸 바쳐 충성했다). ‘孝’자는 慈惠愛親(너그럽고 효성이 있다)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어떤 분의 시호가 ‘文貞公’이라면 글자 뜻은 ‘인격과 학문이 높으며 청백하고 절개를

 지킨 분’이라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글자 의미를 알면 시호만 보고도 그 분의 생애의 특징적인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가령 ‘文’이란 글자는 ‘道德博文’이외에도 ‘敏而好學’, ‘忠信愛人’ 등

 10여 가지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이순신 장군은 이름보다 ‘忠武公’이란 시호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우리나라에 시호가 일반화된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忠武는 ‘군인으로 나라에 충성함’이니 아주 적절하다.

이렇듯 시호 내림은 생전의 이력으로 이미 그 可否가 어느 정도 公論化되며,

 심사의 제도의 객관성과 투명성으로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다.

士大夫 최고 영예는 생전엔 ‘大提學’ 벼슬이고 사후엔 시호 내림이었다.
‘文’으로 發身한 선비들에게 국가적 글[文]을 총괄하는 文衡[대제학]이야 말로

진정 영예로운 관직이 아닐 수 없으며, 政丞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제학만은 그 임명권이 최고 통치자인 국왕의 권한 밖에 있었고,

 임기도 정해져 있지 않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陽村 權近의 외손자로 權擥, 韓明澮 등과 공부한 적이 있는 四佳 徐居正이

佔畢齋 金宗直에게 문형이 넘어갈 것을 염려해 무려 23년을 지킨 뒤

 虛白堂 洪貴達에게 넘긴 것과,
思庵 朴淳이 ‘退溪에게 양보했다’는 일화는 대제학이 갖는 무게의 한 단면이다.

대제학은 당대 최고 文人이라 인정받은 인물이다.

시호 또한 이에 못지않아 사후 업적평가를 통해 국가 공로자로

인정한 총체적 보상이기에 더욱 큰 영예로 인정했다.

또한 시호는 ‘영예로움의 표창’만으로 끝나지 않아, 정확한 말인지 모르지만

현재 大領에서 將軍으로 진급하면 30여 가지 신분 변화가 있으니 시호 내림

또한 이 같은 경우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시호가 내려진 인물은 국가 원로나 공훈자로 추대된 자기에 존경과 더불어 영원히 추모

받을 권리가 합법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봐야 하며, 不遷位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4. 宗宅의 淵源
시호가 내리면 墓碑의 글을 다시 쓰고 告由한다.
‘黃色敎旨’를 태워 그 연유를 고하기 때문에 ‘焚黃告由’라 한다.
이때 자손들은 간혹 ‘이 할아버지에 대해서만’이라 전제하에 은연 중 추모논의를 한다.

훌륭한 조상을 추모하고자 함은 人之常情이다.

그래서 불천위 擁立 여론이 일어나며, 여론이 鄕村의 동의와 儒林들의 公論을 얻게 되면 追慕全用 집을 짓고 고유를 한다.

그 집을 祀堂(혹은 家廟)라 하며 그 안에 ‘龕室’이란 공간을 만들고

 ‘位牌’(神主라고도 함)를 모시게 된다.
이렇게 모신 위패는 살아계신 듯 敬虔하고 神聖하게 보호된다.

이른바 ‘신주 모시듯’해야 하며, 이 같은 절차를 밟아 모신 위패는 이제 개인이 멋대로

 옮기거나 毁損하거나 消滅해선 안 되는 불천위 위패, 이른바 ‘百世不遷’의 불천위가 된다.

물론, 시호가 내렸다고 모두 불천위가 되는 것은 아니며, 조선 후기 賣官賣職 시대에

 내린 시호와 인물들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면 자손들은 정해진 날 추모의식을 하며,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게 된다.

추모의 禮는 제사고 손님 접대는 접빈이다.

이를 ‘奉祭祀’와 ‘接賓客’이라 하며, 이를 전적으로 감당하는 사람이 宗孫이고

그 아내를 ‘宗婦’라 한다.

나머지 자손들은 ‘支孫’이라 하며, 嫡孫으로 내려오는 손자가 종손이고

종손을 지원하는 자손이 지손이다.

이를 조직화한 단체가 ‘門中’이며 이로써 한 ‘家門’이 탄생한다.

종손 집은 다른 집과 다르게 ‘솟을대문’의 집을 짓고, 集姓村에 솟을 대문이 있는 집이

 대개 종가며, 다른 명칭으로 ‘종택’이라고도 한다.

종택은 가문 탄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한편으론 자손 모두의 의지와

 문화의 중심체이기도 하다.

 

5. 종택의 구성 요건
종택의 구성 요건은 누구나 알만한(인정하는) 훌륭한 인물(조상: 시호-불천위-에

봉해진 인물)이 있어야 하고,

이분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사당)이 있어야 하며,

사당을 지키는 守護 주체의 공간(큰집)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당 수호를 전담하는 즉,
맏아들로만 이어온 직계후손(冑孫)이 있어야 하고,이 주손을 외곽에서 보호하는

 후손(지손)이 있어야 하고, 이 자손들로 구성된 단체(문중)가 있어야 한다.

즉 불천위 종택이 되기 위해선 祖上, 祀堂, 큰집, 冑孫(婦), 支孫, 門中으로 구성된

유기체를 갖춰야 한다.
이 중 하나만 없어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상, 사당, 큰집은 하드웨어이고 종손부, 지손, 문중은 소프트웨어다.

이런 구성 요건 속에 작동이 원활히 이뤄져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천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 중심에 宗孫婦가 있음은 두말나위 없다.

 

6. 處士와 不遷位
종택 불천위와 다르게 불천위로 모시는 인물도 있다.

바로 재야학자다 조선시대 당시 명칭은 ‘處士’라 했고 처사는 당대 최고 학자에게만

 부여된 극존칭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이 용어가 남발되어 격이 떨어지지만, 學者에 대한 존경심은

조선 500년 내내 변하지 않았다.

대제학과 더불어 文을 숭상한 조선시대 가치관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었으며,

 ‘處士不遷位’ 위패엔 ‘處士’란 단 하나의 약력밖에 기록되지 않는다.

(예: 顯先祖考後山處士府君神位)
이런 측면에서 처사 불천위 인물들 면모를 보면 시호 이전에 학자란 전제가 우선되며

공부하던 亭子, 남긴 文集 혹은 학문을 잇고자 지은 書院이 있다면 더욱 완벽하다.

이 가운데 문집 有無가 가장 중요한데, 高官의 벼슬을 지냈음에도 학자로 명성이 없어

 불천위가 되지 못한 경우는 허다하다.

‘能文’은 필수조건이지만 ‘能吏’는 충분조건에 불과하다.

요컨대 명실상부한 불천위 인물이란 학자, 문집, 서원, 정자 등을 요건을 갖춰야 하며

 주위에 이런 인물이 있으면 거의 불천위로 보면 틀림없다.

처사는 곧 ‘학자’다 그렇다면 학자가 왜 이리 존경받게 되었을까?

인물에 대한 평가는 ‘操行과 글’로 압축되며 조행은 行 이고 글은 知의 범주에 든다.

이 중에도 글을 단연 소중히 여겼고 글이 곧 사람으로 보았기에,

글과 더불어 인격 향상이 수반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文=人’의 인식은 ‘人事’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보았으며

인사는 곧 ‘他人에 대한 配慮’인데 글로 인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적지 않았기에

우리 조상들은 글을 소중이 여겨 글을 잘하고 못하고를 매우 따졌다.

글은 인간을 정밀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게 하고

言行을 세련되게 기품 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재야학자 즉, 처사들이 당당히 불천위로 추앙받은 사실에 조선시대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게 되며, 뿐만 아니라 처사 가운데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빼어난 인품과

학식이 있는 경우 ‘私諡 ’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벼슬 없이 나라에서 시호를 받지 못한 경우 鄕村사회 공론으로 시호를 증정했으니

이것이 사시다. 지난날 분명 향촌사회에서 사시를 받은 경우는 있었고

 이를 받은 당사자는 물론 후손들의 영예는 말할 수없는 것이었다.

 [<世孝堂實記>란 책에 18세기 대구의 효자며 학자인 樂山 李翼龍(1732~1784)이 죽으니 그 제자들이 喪中에 ‘私諡’를 올릴 것을 거론해 논의 끝에 ‘述孝’라 지었다는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사시는 영예 중의 영예였고 ‘조선시대다움’의 한 단면이며 처사는 官僚를 넘어섰고

처사가 죽으면 불천위로 모시기도 했다.

모셨을 뿐 아니라 당당하고 매우 영광스럽게 모셨기에
불천위도 국가에서 내리는 ‘國不遷位’와
향촌에서 儒林의 公論으로 내리는 ‘鄕不遷位’라 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어디까지나 편의적 구분이지 개념 설정이 분명한 제도적 구분은 아니며 향불천위가 있으니 그 대칭으로 국불천위란 개념이 등장한 게 아닌가 한다.

불천위와 관련된 여러 명칭은 ‘유림불천’, ‘문중불천’, ‘道遷’, ‘鄕遷’ 등이고

불천위는 그냥 다 불천위다.

물론 국가 功臣이나 文廟에 配享된 그야말로 국가차원에서 관리하는 불천위가 있고

 나라에서 ‘不祧位’ 문서가 내려와 불천위로 인정된 특이한 경우도 있다.

굳이 구분하면 ‘시호를 받은 2품 이상의 관리’ 가운데 만인이 다 아는 쉽게 말해 국가적

인물이면 ‘국불천위’고 지역 인물이면 ‘향불천위’고 이것이 가장 정확한 구분이다.

인물의 판단 기준은 개인마다 기준과 취향의 문제는 말할 필요는 없겠으나

조금 다른 각도로 불천위로 모셔진 분들도 있다.

시호는 물론 학자로도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후기엔 문중 차원의

자기 조상 가운데 한 분을 불천위로 옹립하기도 했으니 이는 정통성과 정체성 확립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옹립된 분을 ‘私不遷位’라 한다.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으며

 거기엔 훌륭한 인물 모시기와 따라가기 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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