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을 왜 읽는가?
처음엔 별로 지만
읽거나 듣다 보면 글쓴이의 표정이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도 자세히 듣고 보면
가사 내용이 뜻도 없이 반복되며 빠르고 천박하고
얕은 게 탈이지 뜻은 있어 형광등처럼 조금 뒤에 웃는다.
고전의 시가(詩歌)는 낡은 형광등을 닮았다.
개중에는 신앙 대상을 향한 간절한 기원이 있고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도 있고 삶과 세월에 대한 무상감도 있다.
꼿꼿한 의지와 절개로 어려운 현실을 버텨내는 강인함이나
나랏일과 정치, 경제, 문화 현실에 대한 근심 걱정도 담겨있다.
가끔 독불장군처럼 흥분하고 분개하며 침을 튀기지만
정녕 대책도 없고 실속도 없이 찌껄이다 스스로 지쳐 쓰러지고 만다.
혼자서 대중탕에서 실례를 한다고 탕의 물색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시냇물 속에 박힌 돌맹이는 유속은 잡아도 방향은 바꾸지 못한다.
모든 글에는 숙성기간이 있다.
학문도, 학설도 시공(시대)이라는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노인도 처음도 노인이 아니었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건도 숙성기간이 짧았던 게 탈이었다.
천동설과 지동설, 멘델의 법칙 등
산삼도 씨앗이 싹트는데 50년이 걸리듯 조건과 절차가 있다.
인생이란 꽃씨도 바라보는 시선도 천차만별이다.
사뭇 진지할 때도 있고, 흥청거리며 놀 때도 있고,
근엄할 때도 있고,
제 뜻대로 안될 때는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삐딱할 때도 있다.
그럴 땐 글도 생각도 비뚤어져 있다.
이러하듯 고전시가도
시공만 달리 할 뿐이지 우리가 인생에서 겪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정서를 담았으니 그 자체로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 시가를 통해 선현들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지금 물가에 서 있는 듯,
숲속을 거닐고 있는 듯,
신선을 만나고 있는 듯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들의 노래 속에서
내 삶을 성찰해 볼 수도 있고, 괜한 집착이나 좁은 소견을
툭툭 털어버리는 여유를 갖게 되기도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위아래 눈치 보며 살던 강박관념이 그대로
남아 아직도 하루하루를 뭔가를 향해 여유 없이 달려가는
우리들이 아닌가?
빡빡한 일상을 만들어서 쫓기며 살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남 말 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그렇다.
자신이 향하는 지향점 이외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못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고전 시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별천지를
여행하는 느낌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은 아무나 읽을 수 있지만 누구나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마치 소가 물을 건널 때 깊고 얕음을 표현은 못해도
느낌은 있듯이,
고전 시가를 통해 느림과 기다림과 여유는
처음에는 낯이 설지만...
곧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러한 깊은 성찰을 불러 올 것이다.
마치 댓글은 못 달거나, 안달아도 그 글에 대한
공감과 비공감이 있듯이 말이다.
고대의 걷는 삶, 근대의 뛰는 삶,
초현대의 달리는 삶의 질과 양 차이를 느끼며
비포장도로를 지나는 데 케이티엑스가 지나간다.
병신년 춘삼월 두 번째 일요일 새벽 취람 여포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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