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문경 마성 박열기념관를 다녀와서

오토산 2018. 7. 2. 11:50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1425



문경 마성 박열기념관을 다녀와서



순례길 답사 4일차(6/21) 하지날이라 불볕더위가 내리는 답사를 출발하여

 상주 함창의 7읍 연합의병전투지  태봉앞 들에서 김지훈 차장으로부터

 태봉전투의 실황을 생생하게 들은후

문경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 기념공원을 찾아갔다.


박열기념공원에는 생가와 기념관, 정자, 가네코후미코 묘소가 조성되어 있었고

문주에는 태극문양과 건곤감리 문양이 새겨져 나라사랑의 현장임을 알려주었으며

기념관에서는 이 곳에서 근무하였던 장성욱과장이 상세하게 설명을 하여주었다.


박열(朴烈 1902~1974)은 문경시 모전동에서 태어나 마성면 오천리 샘골로

이주하여 살았고 경성보통학교 재학시 3.1.운동을 경험하고 민족저항운동에 눈 떠

 1919.10.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흑도회와 흑우회를 이끌며

일본에 저항하다 1923년 일본황태자 암살계획 대역사사건으로 체포되어

세계감옥사에서 일죄일범(一罪一犯)으로 8,01일(22년2개월1일) 옥고를 치르고

살아남은 혁명가로 기록되고 있다.


1925.2.26.대심원 공판을 앞두고 후세 다츠치 변호사를 통해

재판장은 천황의 대표요 나는 조선민족의 대표이니

재판장의 법복과 같이 나는 조선예복을 입게 하여 주고

조선인으로 일본의 강도행위를 선언토록 하여 주고

일본어를 쓰고 싶지 않으니 조선어로 할테니 통역을 세워주고

재판장과 내가 앉는 자리를 같게 하여 달라 요구를 하여

후미코와 사모관대에 한복을 입고 재판을 받는등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의 주장으을 펴며 항일투쟁을 하여온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6. 1. 신조선건설동맹 위원장,  1946.10. 재일조선인거류민단 단장을 하였고

6.25.때 납북되어 1974년 74세로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출소시 교도관이 박열에게 '내 아들을 양자로 보내고 싶다'할정도로

일본인들에게도 부러움을 샀으며

후세 다치츠변호사는 유일한 일본인 독립유공자라는 설명을 들으며

가네코후미코의 묘소 옆에 박열의 시신이 함께 안장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묵념을 하고 호계면에 잇는 알콩달콩에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세상사 한마디

'나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의 일꾼으로서 한 병졸로서 일한다.'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것을 지표로 한다.'

<박열의사 어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