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안동정신의 도도한 맥을 이은 손홍량

오토산 2019. 6. 5. 00:16



경상도를 빛낸 위대한 인물<3>
가문 - 안동정신의 도도한 맥을 이은 손홍량



 

일직손씨의 중시조인 정평공 손홍량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26세손인 손호영 안동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뮤지컬 왕의나라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도 그의 유별난 조상 흠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강권에 가까운 애원이 없었다면 밤새워 서재를 뒤져가며 손홍량을 탐독하는 사건은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하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얻은 것이 많다. 그는 몇 년 전 공민왕이 정평공에게 하사한 지팡이인 구절산호용장(九節珊弧龍杖)을 복원하여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마친 뒤 관광 상품화시킨 것에 대해 후손으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나 또한 손홍량에 관해서는 무시 못 할 전문가가 되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필자 주>

7백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손홍량에게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와의 대면이 갖는 의미를 작가적 본능으로 직감했다. 난, 이 작업이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며, 완곡하게 비켜가지 않는 한 역사적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중압감이 글 쓰는 내내 나를 짓눌렀다. 피할 수만 있다면, 솔직히 비켜서 가고 싶었다.

아마, 단언하건대 7백 년 전, 한 사나이도 그랬을 것이다. 왕조가 바뀌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문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몸) 숙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전부 대신,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전부를 잃는 일직(一直)의 길이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부당한 권력에 꺾이지 않았던 한 가문의 파란만장한 삶(정신)의 보고서다.

난, 이 가문의 이야기가 왜 이토록 오래도록 아웃사이드(변방)에 머물러 있었는지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거대 문중이 밀집해 있는 안동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터이다. 별 것 아닌 일도 포장하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마저 기이한 논리로 뒤엎어버리는 희한한 일도 보았던 터라, 어느 가문의 오래된 역사가 비밀창고에 꽁꽁 숨겨져 있었다고 해도 별로 이상스러울 것은 없다.

난 정면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역사의 깊숙한 어느 한 지점에서 해후한 그는 이미 내게 빼어든 칼을 도로 집어넣지 못하게 할 만큼,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역으로 치닫는 광폭한 기세에 눌리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도도한 정신을 대면할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정신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역사 속의 인물 손홍량에 접근하면서 나름대로 몇 가지의 원칙과 기준을 세웠다. 첫째, 그의 정신을 이 시대에 불러내고 싶은 욕심에 해석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족한 사료로 빗어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은 틈새 역사해석으로 이를 보완하고자 노력했다. 역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으나 보존된 하나의 사실을 갖고 상관관계를 유추할 수 없다면 우리역사의 빈 공백은 무엇으로도 메 꿀 수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손홍량 가문의 정신이 이 시대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으며, 만약 반영되고 있지 않다면 그 연유가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폈다. 이 문제는 또한, 고려개국의 일등공신인 삼태사와 중기의 걸출한 인물 김방경을 이은 위치에 정평공 가문(고려말)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 퇴계로 이어지기까지 공백으로 비워져 있는 안동정신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작업을 방기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우리의 반성과 연결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안은 뒤에 언급하겠지만 사상적 측면에서 조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유교적 학풍(주자학을 한정하는 말이 아님)을 계승한 주류적 안동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때문에 짧은 시간이지만 손홍량이라는 인물이 갖는 역사적 비중과 역할 속에서 숨겨진 암호를 발견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단 3일간의 몰입이지만 안동문화에 접근하면서 느낀 소회는 우리 역사가 승자중심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었다. 정치적 승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기류는 문화적 승리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었다. 이 글은 읽은 이들은 이제 왜 안동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문중 중심으로 과도하게 치중되고 편중된 맹목적 역사인식이 엄청난 오류와 왜곡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원고 청탁을 받고, 자료수집과 취재, 사진촬영을 단 3일 만에 해치워야 하는 시간적 촉박성 때문에 깊이에서 잠을 한 숨도 자지 않은 성실성을 담보하고도 어느 정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 뒷날 시간을 내어 보완할 것이지만 뜻있는 학자제현의 분발을 촉구하는 바이다


정평공 가계에 대해서는 영조 15년, 곡강 배행검이 지은 정평공 1)유사가 있다. 거기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선생의 본성은 순(洵)이었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 그의 5대조 응(凝)대에 손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원래 복주의 타양현(현재 일직면과 주위의 몇 개면이 합쳐진 지명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사람이며 시조 간(幹)이 신라왕을 모시고 일직군에 행차하니 비로소 관을 일직으로 했다. 증조부의 이름은 상의직의직장동정의 벼슬을 지낸 세경(世卿)이고, 조부는 중현대부전객령을 지낸 연(衍)이다. 봉익대부밀직부사상호군 송(松)의 따님인 안동 조(曺)씨와 합문지후 벼슬을 지낸 아버지 방(滂)사이에서 1287년(충열왕 13년) 안동 일직에서 태어났다.

과거를 1307년에 급제한 것으로 보아 첫 관직은 충렬왕 서거 2년 전인 재위 33년에 19세의 나이로 시작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영조 때 배행검이 지은 정평공유사에 충선왕 때 관직에 진출했다고 기록이 보이고, 이색의 사장시와 조선조의 박팽년이 정평공의 손자 손조서(孫肇瑞)의 말을 인용한 진권서에도 5조(다섯 임금)을 모셨다고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정작 어느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계산을 해 보아도 여섯 임금이 아니라 다섯 임금을 모신 결과가 된다. 기록자들의 부주의인지 과거급제 날짜를 잘못 기록했는지 여하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생의 벼슬길은 비교적 순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충목왕 4년(1348년)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이때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충정왕 즉위 원년(1349년)에는 추성보절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이 되고, 이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으며, 삼사의 으뜸 벼슬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이듬해 복주부원군(福州府院君)에 책봉되는 등 치사(65세)로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왕 등 여섯 임금을 섬겼다.

이후, 공민왕 13년(1362년) 그의 나이 76세(박팽년의 진권서에는 78세로 기록되어 있다.) 되던 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을 오니 이 일은 손홍량 가계는 물론, 안동 전체가 정치 역사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과 정평공의 정치적 관계

공민왕과 정평공의 관계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둘 사이의 관계를 당시 상황과 정황에 비추어 정치적 이해도를 중심으로 따지지 않고 뒷날 일어난 현상에만 편중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역학관계를 추론하거나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발견된 문헌이나 문헌을 재해석학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류다.

그가 여생을 무탈하게 보낸 것과 공민왕 안동 몽진 후, 가문이 엄청나게 부상한 것은 일면 상통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모순 양상을 띤 복잡한 사안이다. 이러한 핵심적 사안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채 일방적이고 나열된 식의 인물조명은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

손홍량은 그전에 강릉대군 왕기(공민왕의 이름)와 어느 정도의 친분내지 정치적 유대를 형성하고 있었을까? 기록이 없어 세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역사적 상상력으로 접근했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당시 상황은 격심한 격변기였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14세의 어린나이로 죽자, 고려조정은 후사 문제로 제 세력들 간에 정치사활을 건 치열한 쟁투가 벌인다. 이때 고려 조정의 중론은 강릉대군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현, 왕후, 윤택, 이곡, 김경직 등 중신들 대부분이 왕기를 적극적으로 지지, 추대하는 상소를 원나라 황실에 보냈다는 사실이 이러한 점을 반증한다.

그러나 결과는 충정왕 왕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 때문에 훗날 공민왕에 오르는 왕기는 측근들 대부분이 곁을 떠나는 참담한 정치적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내가 이 부분의 해석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정평공 가문의 훗날 정치적 비상(飛上)이 이 사안과 어떤 식으로든 연계가 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의 중대성을 상기하고 앞뒤를 살핀, 나의 결론은 손홍량이 절대 왕기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중신들이 강릉대군을 지지하는 상소를 원나라에 올리는데도 이름이 빠져 있을뿐더러, 뒷날, 이승로, 윤택 등이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국정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할 것을 간하는 상소에도 이름이 올라있지 않다.

물론, 강릉대군의 왕위계승을 반대한 기록 또한,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정치적으로 정확하게 어떤 지점에 서 있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12살 어린 나이로 즉위(1349년)한 충정왕의 집권 하에서 3년간 중책을 수행한 것으로 보아 왕저를 지지했다고 추론해도 사실에 다가섬에 크게 벗어남이 없을 것이다.

이 같은 가정의 설득력은 이후, 그의 행적에서 여실하게 읽을 수가 있다. 정평공이 중앙무대에서 맹활약하던 시기는 충목왕(재위기간 4년)과 그 뒤를 이은 충정왕(재위기간 3년)의 재위 기간을 합친 대략 6,7년간으로 파악된다. 1348년(충목왕 4년) 첨의평리 때 정조사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충정왕 즉위 원년(1349년)에는 추성보절좌리공신이 되었다. 이어 도첨의찬성사가 되었으며, 판삼사사를 거쳐 이듬해 복주부원군에 책봉되는 등 중요한 직책과 벼슬이 충정왕 치세 3년 안에 모두 이뤄졌다.

그윽이 살피건대, 그에게 주어진 직책들은 아마 충정왕 왕저의 즉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을 것이다. 특히, 추론의 설득력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부분은 그가 벼슬길에서 물러난 시기다. 65세 되던 해 취사(致仕)를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그 때가 바로 충정왕이 폐위(1351년)되던 바로 그해였다. 정확하게 물러난 월과 날을 알 수가 없어 폐위된 날짜와 물러난 일월을 비교 구분할 수 없음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어째든, 이유를 불문하고 그가 나이가 들어 물러났던, 당파 세력들 간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에 진절머리가 나 향리로 낙향을 했던 이후 전개되는 상황은 정평공 가문의 정치적 부활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 또한, 추론컨대, 공민왕이 즉위 후, 3개월 만에 왕위를 내주고 강화도에 머물러 있던 충정왕을 독살하고 반대파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손홍량의 건재는 어떤 면에서 불가사의하다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4가지 설을 제기해 본다. 첫째, 손홍량이 기록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원래부터 공민왕 사람이었을 가능성이다. 왕기와의 왕위계승 싸움에서 충정왕의 모후인 희비윤씨 세력이 원나라의 도움으로 승리했지만 국내 기반의 허약함으로 강릉대군의 지지기반을 끌어안았을 가능성이다. 이때 정평공은 왕기의 내락 하에 그의 안전을 담보하는 조건으로 충정왕을 도와 달라는 희빈 윤씨측의 제의를 수락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설은 뒷날 정평공과 공민왕의 해후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공민왕의 입장에서 상황이 절박했다고 해도 환도 후, 그에게 베푼 은혜는 가히 파격이었다. 손수그린 초상화와 지팡이, 그리고 당대 문인 정치가들이 그에게 바친 문장의 호의(好意)는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원래부터 지극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둘째, 손홍량이 아주 공평무사한 인물이어서 조정에서 추앙받던 인물일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왕기와 왕저의 왕위계승 다툼이란 기실, 누가 국권(國權)이 되어도 명분이 있었던 만큼, 그가 제 세력들을 조정하는 역할과 주장을 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만약, 격심한 대립 속에 빠진 조정에서 화쟁을 논했다면 이는 당파의 이해를 떠나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선후공사(先後公私)의 몸가짐으로 이해될 수 있어 물러난 이후에도 집권세력이 감히 그에 대해 언급하는 자체를 금기했을 수도 생각해 봄직하다.

세 번째는 이제현의 예에서 보듯 왕위계승 다툼에서 왕기를 지지했음에도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충정왕이 즉위하자 제조경사도감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한데서도 알 수 있듯 왕실이 중신간의 지위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한 한계적 상황이 빗어낸 일시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정부분 독자적으로 군사적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하지만 문신이었고 난국에 몸소 어가를 맞이한 가풍이나 이에 왕실과 조정이 그에게 보여준 특별히 환대의 예에 비추어 이 가능성은 아주 낮아 보인다.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손홍량 가계의 급부상

손홍량이 환도 후 공민왕에게 받은 궤장과 초상화, 그리고 중앙정계의 문인들이 그에게 바친 사장시는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일련의 안동위상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손홍량 가계의 급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손홍량은 몽진 이듬해 두 아들과 함께 난을 평정한 하례를 올리기 위해 왕성을 찾아갔다. 이때 공민왕을 비롯한 중앙정계의 환대는 실로 파격이었다. 왕은 구절산호용장이라는 지팡이와 손수그린 초상화를 하사했다. 왕실이 손홍량에게 보인 이 때의 호의는 고금의 전례에 비추어도 드문 일이었다. 현재 전해지는 사장시 5편과 백문보의 시서는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꼼꼼히 살피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왕실과 중앙정계의 손홍량에 대한 환대는 단 하나의 사실, 즉, 몽진 시, 영접에 대한 화답의 성격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영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왕이 홍건적을 피해 남하를 하는 과정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 정, 모든 고을이 예를 갖추어 왕을 맞이했다는 것은 상식의 수준이다. 그런데도 기록은 오직 공민왕이 손홍량에게 말했다는 "그대는 나이가 들어도 일직한 사람이로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쏠려 있다. 외형적 역사는 오직 이 부분에만 포인트(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을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여 버리면 날줄과 씨줄 속에 묘연하게 감춰진 역사적 행간을 상상력으로 불러올 수가 없다. 손홍량의 공민왕 영접으로 대변되는 상징은 충절의 또 다른 강렬한 표현 방식일 뿐이다. 그 속에 숨겨진 사실은 손홍량으로 대표되는 안동 인물들의 목숨을 건 헌신일 것이다. 가령, 손홍량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무는 동안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성을 회복하는 데에 모종의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군사를 모으고, 인심을 다독이며, 전략을 세우는 등 정세운을 총관으로 반격을 도모할 때의 전과가 어쩌면 영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공민왕에게 크게 어필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러한 신뢰의 중심에 손홍량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이후, 대도호부로 격상되는 안동의 위상과 손홍량 가계의 급부상을 설명하는데 오히려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초상화에 관한 것이다. 여러 기록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손홍량의 초상화를 공민왕이 그렸다는 주장이 유력하나 그것을 언제 어떻게 그렸느냐 하는 문제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생각들이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 훈장을 넘어서는 명예를 임금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하여 환영축하연에서 축시를 유명 인사들이 지어 바쳤는데 그 글속에는 하사 받은 지팡이 이야기만 나오고 초상화에 대한 언급은 없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조선 세종조에 그의 손자 손조서가 궤장에 관한 사장시는 보존되었으나 초상화에 관한 축하시는 유실되어 안타깝다는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건대, 손홍향이 귀향할 때 지팡이와 초상화를 함께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초상화는 뒷날에 왕이 직접 그려 사람을 통해 전달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왜냐하면 전해오는 시서와 사장시가 6편(백문보,이인복, 이색,정사도,이달충,김제민)있는데 어디에도 초상화 이야기를 노래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실된 초상화 관련 사장시란 뒷날의 일이어서 전해오는 사장시와는 내용이 별개라고 보면 크게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문충공(文忠公)이인복(李仁復)의 사장시

세상 사람은 높은 벼슬과 오래 삶을 좋아하는데 /빛나는 덕은 그 누가 쉬 갖추겠는가./ 오직 공만은 이미 그 덕을 갖추었으니/나아가고 물러섬에 또한 거리낌이 없구나./ 찬 겨울바람에 모든 초목이 시드는데/소나무와 동백은 오히려/그 푸르름 오래 가지네/임금님은 그분이 찾아옴을 기뻐하여/상산사호와 같이 존경 하는구나 /왕궁에 들어가니 지팡이를 내리시고/ 예절을 정중히 하는 마음 더욱 깊구나./ 임금이 총애하니 양표보다 앞서고/ 베푸는 은혜는 공광보다 더 깊구나/임금의 은혜를 지니고 고향에 돌아오니/ 축하하는 사람이 어이 그리 많은고/ 행실은 높아 세상의 문란함까지 바로 잡는구나 /자나 깨나 이 일에 뜻을 두었으니 /고마움을 칭송하는데 뒤질손가 /응당 천보시를 노래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수하리라

齒爵人所尊匪德孰能有惟公旣有之進退亦無苟歲寒?木彫松栢尙持久
主上喜其來等視商山臾臨軒賜以杖禮重意彌厚寵在楊彪先恩居孔光右
携持歸故鄕賀者爲奔走行當?原人豈特扶無朽晟昏宜念慈報稱安可後
應歌天保詩上祝 聖人壽
*商山四晧=신선을 이름 *揚彪=후한때의 명신 *孔光=전한때의 명신 판예문춘추관사(判藝文春秋館事)

김방경의 손자 김제민(金薺閔)이 지은 사장명(賜杖銘)

오직 이 지팡이가 특별한 것은 /우리 임금님이 내리신 바이다. /오직 이 지팡이만이 빛나는 것은/우리 승상님의 경사로움이다/임금님은 공의 기둥이 되셨고/공은 나라의 기둥이 되었어라/거룩하도다 이 지팡이/그 지닌 뜻이 길이 변함이 없도다.

惟杖之奇吾 上之賜惟杖之微吾相之瑞上以柱公公以柱國於戱斯杖其義不式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사장시

신선이 머무르는 산에는 구름이 아득한데/송진이 무덤되어 茯笭이 나는구나 (휼륭한 인재를 비유함)/그늘진 언덕 돌 틈에는 한줄기 새싹이 푸르러/오랜 세월동안에 蛟龍의 모습이 되었구나 (굳세고 신령함이 깃든 모습)/어리석은 얼굴과 움추린 기상도 번개와 겨루었고/하늘이 보살펴서 예절법도를 갖추었더라/야윈 모양은 한우이고 키는 한길인데/그 강직하고 대쪽같은 성품 쇠소리와 같더라/세상엔 못 안에 용이 구름 위를 날지 못할까만/평지에서 구슬을 아름답게 굴리기만 못하리/中官이 내리신 말씀 받들어 뜰 앞에 올리니(왕명을 시행하는 벼슬 이름)/거룩한 광경은 뜰 앞에 蓂草를 빛내었구나.(요 임금 때 뜰에 난 吉非의 풀)/왕은 때마침 옛일을 찾아 현명한 신하를 대하는데/공께서 때 맞추어 왔으니 뉘가 더 앞서리/공께서 다섯 임금을 모시고 승상이 되었으나/초야에 숨어 지내니 鈴鐸에 이끼 끼었으나(警鐘) /임금님 그리는 절실한 마음이야 막힐 수 있으리오/임금님은 항상 南極星 같이 만수무강을 이루면서(오래 사는 별 이름)/젊어서는 힘을 다하여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였으니/높은 덕망과 공로에 보답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이다./공은 사양하기를 신하의 공이 한 치도 못되거니/ 저으기 우러러 임금 은혜를 사례하니 신하의 얼굴 붉어지네/내가 지난날 沈香亭에 둔한 붓을 들었더니/노래를 짓게 하여 공께서 조용히 들으셨다/지팡이 난 곳은 깊은 산 속 좁은 땅에 많은 숲 속의 한 줄기인데/네 어찌하여 착한 임금을 만났는고/거룩하기가 鍾矢에 새긴 銘과 같으리(종과 화살, 오래도록 기념할 글)/공은 지금 지팡이에 의지하니 생기를 얻었도다/옛날 공이 조정에 있을 때 조정이 깨끗하며 밝았고/공이 가신지 십 년만에 어지러움을 들었네/요사이 옛 친구들은 태평함을 노래하는데/공은 어찌하여 태백산 비탈로 돌아갔는고/임금과 신하가 서로 존중하노니/머리를 조아려 임금 오래 사심을 축수하였네

 

안동 정신의 도도한 맥을 이은 상촌 김자수와 백죽당 배상지의 충절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후, 송홍량 가계의 급부상은 관직의 순조로움으로 이어졌다. 손홍량의 외손인 상촌 김자수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고, 다른 외손들인 백죽당 배상지(판사복시사), 배상도(보문각직제학), 배상경(공민왕조 문과), 배상공(공조전서) ,아들인 득수(밀직사좌대언지삼사), 득령이 전공판서겸진현관대제학에 오르는 등 가문의 번창이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가문의 번창과 반비례하여 불어오는 역풍(역성혁명의 기운)은 손홍량 가문에 선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역성혁명의 동조와 절의라는 대의명분 사이에서 손홍량 가문은 일제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선택을 한다. 아들, 사위, 손자 등이 모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함으로써 유교에서 강조하는 군신간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던 안동정신의 이어짐과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새롭게 조명할 가치가 충분한 역사적 사실을 안동이 또 하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점은 다 시 한번 강조하지만, 안동의 정신사 측면에서는 비중 있는 무게로 다뤄져야 한다. 삼태사에서 시작된 안동정신이 퇴계로 이어지는 가교(架橋)에 손홍량 가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안동정신이 중간에 공백 없이 늘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태평할 때는 효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목숨마저도 버릴 수 있음이 안동정신을 상징한다면 손홍량 가문은 유교정신에 입각하여 불사이군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안동정신을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중, 상촌 김자수는 이미 고려조에 이름난 효자로 알려져 공양왕 때 고려도관찰사 김자수마을이라고 쓴 효자비가 남문 밖, 그러니까 현재의 위치로 보면 안동시 안기동에 세워졌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상촌은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안동으로 내려와 남문 밖에서 은거했다. 이때 태종 이방원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차례 출사할 것을 제의했으나 매번 거절하였다. 이에 노한 태종이 다시 형조판서를 제수하며 만일, 응하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위협하자 아들 근(根)을 데리고 고려에 대한 마지막 충절을 지키려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몽주의 묘소가 있는 추령(경기도 광주)에 다다르자 말에서 내린 상촌은 "평생 충효의 뜻 금일에 누가 있어 알리요. 한 번 죽어 원한의 눈 감으면 저승에서라도 알아 줄 이 있으리"라는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가슴에 품고 온 독약을 꺼내어 한 많은 세상과 하직한다. 이러한 충절로 두문동 72현으로 추앙받기도 하는 선생은 이 때문에 산소가 안동이 아닌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에 있다. 유허비와 효자 정려각, 그리고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추원재는 안동시 안기동에 있다.

안동시 송천동에 있는 금역당은 백죽당의 고택(종택)이다. 고려가 망하자 동생 배상공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안동으로 왔다. 이 때문에 안동에 있는 흥해배씨들은 모두 백죽당과 배상공의 후손들이다. 백죽당은 굴공의 고사에 따라 조정에서 모자를 벗고 옷소매를 떨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로 백죽(소나무와 대나무)을 심고 그 가운데 집을 지었으며, 시주(詩酒)를 벗 삼아 홀로 늙어갔다. 본조(本朝)에서 끝까지 지조를 더럽히지 않아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역시 두문동 72현으로 존숭받고 있으며 사림은 그의 지조를 기리고 뜻을 받들기 위해 선조1년(1568) 서후면 금계리에 경관서원을 세우고 선생을 배향했다.

손홍량이 안동정신사에서 갖는 비중이란 그의 가문과 혼인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연비관계의 사람들에까지도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유교적 행위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답게 손홍량 행적 안동정신으로 승화시켜야

오늘날 안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로 굳건히 자리매김을 했다. 그런데 안동에서 발간되는 여러 책자들을 검토해 보면 안동의 정신이 퇴계선생과 선생의 학맥을 계승한 거유나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안동정신의 연원에 대한 주류적 해석을 퇴계와 그의 학맥을 계승한 차원에서 이해하거나 바라보는 시류에 대해 논쟁하거나 호불호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연구를 통한 생산물과 일반적 활자의 생산이 조선 중기 이후의 사상이나 사회 현상에 편중되어 버리면 더 오래된 옛 것과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이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안동정신을 한정시키는 오류에 빠져들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기록 환경이나 연구를 지원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도나 편견, 눈치 보기가 하루아침에 개선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은 길게 늘어놓는 것은 안동지방의 문화풍토와 기록경향에 관해 일침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건 고구(考究)하건대 선현들이 선현을 바라보던 자세와도 상반되는 태도다. 적어도, 우리가 추앙해 마지않은 선조들은 대의와 명분에 따랐지 요즘처럼 어리숙한 계산이 앞서지는 않았다.

손홍량만 하더라도 그가 올바른 사람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사림의 숭모 분위기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어필영정각이 세워진 것이 조선 초기였고, 타향리사에서 지내는 향사를 타향서원으로 승격(영조17년인 1741년)시켜 모신 것도 지역 사람이었다.

영조 20년(1744)에는 현, 타향서원 자리 인근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음기는 좌의정 조현명이 찬하고, 전면 대자는 우의정 서명균이, 비명은 이광정이 지었다.

고려의 유신을 조선조에서 떠받들었다는 것은 정신의 현창이란 보편적 가치는 시공간과 정치적 편견, 더구나 문중의 이해와는 아주 멀리 벗어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곰씹으며 음미해야 하리라.

안동에 밀집된 서원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제외하고(전국 47개 서원만 존속)1868년(고종5년)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대부분 훼철되었다가 이후 사림에 의해 하나 같이 복원이 되었다. 이에 반해 타향서원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일직면 송리 뒷산에 단(檀)만 쌓아둔 채 오랜 시간 방기되어 있었다. 물론, 그의 후손들이 외손봉사를 위해 경남밀양으로 이주를 한 탓에 문중으로써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던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타향서원의 복설은 1984년에 이르러 안동에 부임한 손홍량의 후손인 당시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장에 의해서 주도되기까지 우리의 정신 속에서는 거의 잊혔진 존재였다.

또 하나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손홍량에 대한 조명 작업이 시작된 것은 아주 최근세의 일로 안동시와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가 발간한 2004년 판 '고려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에서야 비로소 대략의 개관을 보인다는 점이다.

안동만큼 활자와 학문을 통해 조상의 정신을 나타내는데 열성적인 곳도 없으리라. 후대에 이를수록 학문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정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남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손홍량 정신에 대한 재조명과 기록문화와 무형적 행위를 통한 문화적 확대 재생산 작업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환원해서 이 말을 맺은 말로 정리를 한다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한 안동의 정신이 실질적으로 한정되고 경계 지워진 탓에 손홍량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바라보는 불합리가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란 편견을 걷어낸 자리에 선생을 굳건하게 안동의 정신으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일일 것이다.

<최성달/작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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