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퇴계인문아카데미에서 퇴계선생묘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5. 3. 21. 10:47

퇴계인문아카데미에서 퇴계선생묘소를 다녀와서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인 3월 20일 15:30

퇴계인문아카데미 회원들 55명이 오늘 개강식을 마치고

이육사문학관을 탐방하고 퇴계선생 묘소를 답사하러 갔다.

 

묘소아래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 앞에서

이동신 강사님이 종택앞을 흐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상류측을 상계(上溪)로, 하류측을 하계(下溪)라 부르고

남측을 계남(溪南)이라 불린다는 인근의 지형을 설명하면서

건너편에 위치한 퇴계선생묘소와 그 아래의 며느리 봉화금씨묘소,

배위이신 안동권씨 묘소와 아들, 손자분들의 묘소위치도 설명하였다.

 

하계마을은

퇴계선생이 46세때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살으셨고

돌아가신 후에 체백(體魄)이 모셔진 묘소가 자리한 마을로

손자 동암 이영도(李詠道 1559~1637)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현재까지 동암선생의 종택인 수졸당종택이 자리하고 있으며

400년동안 수많은 문인 학자와 관료들을 배출한 마을이다.

 

퇴계선생님이 거처하시던 양진암(養眞庵) 옛터를 지나서

뒷편 능선으로 계단길을 올라서 퇴계선생묘소를 갔다.

 

며느리 봉화금씨 산소를 지나

소나무숲속에 자리한 천년유택이 자리하였고

묘전비에는 관직을 쓰지 않은 < 퇴도만은이공지묘 >라 새긴 비에는

손수지으신 자명(自銘)과 제자 고봉이 지은 묘갈명이 새겨져 있었고

묘소앞에는 동자석 2, 망주 2, 문인석 2, 묘비 1기가 서 있었다.

 

묘소에 참배를드리고  권오추 강사님이

퇴계선생이 삶을 마무리하시는 과정을 날짜별로 상세히 설명하시며

'梅兄에게 불결하여 내 마음이 미안하다'며 매화분을 옮기게 하시고

자제들에게 빌려온 책들을 기록하게 하여 잊지말고 돌려주라 하시며

조카에게 유계(遺戒)를 받아쓰게 하신 내용은

1. 국가에서 예장(禮葬0을 하려거든 고사하여 예장을 하지 말라.

2. 상사(喪事)에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라.

3.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 <退陶晩隱李公之墓 >라고 쓰고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지행(志行)과 출처(出處) 등을 간략하게 쓸 것

4. 장례절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시속에도 맞고 고래에도 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등 고종(考終)과정을 설명하셨다.

 

예장을 수차례 사양하였으나 임금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고

묘소는 예관의 주장에 의하여 석물 등이 조성되었으며

행적을 감히 정리하실분이 없어 행장없이 시호가 내려졌고

고봉도 묘갈에서 적지 못 한 부분을 문집에 추가로

기록하였다는 설명을 하셨다.

 

이원봉 강사는

퇴계종가에서는 현재까지도 불천위제사를 지낼때

조율이시(棗栗梨枾)와 시절과일(時果) 두가지를 쓰고 있고

유밀과는 쓰지 않으며 사돈집안에서 선물이 와서

단 한차례 쓰신적이 있었다는 보충설명을 듣고

우리는 며느리 봉화금씨묘소로 이동하였다.

 

권오추 강사님은

며느리 봉화금씨가 유언으로

'시아버님 생존시에 내가 시아버님을  모시는데

여러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 라도 시아버님을 모시고 싶으니

반드시 아버님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주도록 하여라'라고

유언을 남기시어 이 장소에 모시게 되었다는 설명과

묘소에 대한 설명을 하시며 오늘의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

 

오늘도 퇴계인문아카데미에 참석하여

 착한사람이 많은 사회(所願善人多)를  염원하셨던

퇴계선생님의 삶을 배우면서

강의를 하여주신 이사장님과 강사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함께하신 모든회원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晝之所讀을 夜必思釋하라'하시다<김성일>

낮에 읽은 것은 밤에 반드시 생각하고 따져 보아야 한다'하였다.

                                                             -퇴계선생 어록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