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중대바위아랫마을 서미리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5. 1. 5. 09:27

중대바위아랫마을 서미리를 다녀와서

 

1982년 문교부가 중.고등학생의 교복자율화를 발표하였던 1월 4일

도청 천년숲에 조성된 박정희대통령 동상광장을 돌아보고

풍산으로 와서 중대바위 아래에 있는 서미리를 찾아 갔다.

 

풍산읍사무소를 지나 시골길을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이 신양저수지,

신양저수지을 올라서니

1999년에 세워진 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遺蹟碑가 있었고

그 옆에 1987년 착공, 1997년 준공하여 농어촌공사가 관리하고 있는

新陽貯水池竣工功績碑가 2024년에 세워져 있었다.

 

신양저수지를 지나 산길을 한참 오르니 서미리 마을이 있었고

뒷산에 탕건과 같이 생긴바위(중대바위)가 마을을 내려다 보고있는 

마을앞 정자(廣巖亭)앞에서 운동을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를 만나

마을의 유래와 현황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자앞의 표지판을 보았다.

 

서미리와 청음 김상헌 선생의 인연에 대하여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선생은 본관은 안동,

자는 叔度, 호는 淸陰, 石室山人, 西磵老人, 시호는 文正으로

중국이 명(明)에서 청(淸)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온몸으로 맞섰던 인물이며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했고 

노년에 청으로 압송되면서 절의를 지켰다.

 

벙자호란이후 고향인 풍산읍 소산리의 청원루에 은거하시다가

서미리에 초가 두어칸을 지어 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란 

이름을 지으시고 거쳐를 하셨고 서미골의 깨끗한 석간수를

벗삼는다는 뜻에서 서간노인(西磵老人)으로 자칭하고 생활하셨으며

옛날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고 산 것과 

자신의 처지가 같다고 하여 서미(西美)의 미(美)자를

고사리미(薇)자로 바꾸어 서미(西薇)라 하셨다고 전한다,

 

표지판 옆에는 청음선생이 71세의 연세로

청으로 압송될때 남기신 우국충절(憂國忠節) 시(詩)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몰동말동하여라'라 적힌

시판도 보였다.

 

우리는 중대바위쪽 마을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바위위에 건립된 비각을 돌아보았으며

커다란 바위에는 목석거(木石居)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아래부분에 '庚辰仲春先生七代孫本府使學淳書'라 새겨져 있어

1830년(순조 30) 김학순 부사가 비석과 비각을 새우고

새긴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석거 아래에 있는 서간사 강린당(西磵祀 講麟堂)은

인조때 판서로 계셨던 김상헌 선생께서 낙향하여

제자를 가르쳤던 곳으로 1689년(숙종 15) 지방사림에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간사가 있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왔으나 흥선대원군 당시 헐려

지금은 강린당만 남아 있으며

관직은 좌의정, 증직은 영의정, 시호는 문정공으로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이

하회마을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완성하시고

1605년(선조 38)년 9월 서미(西美)마을에 우거하시어

이듬해 3월 초옥을 짓고 농환재(弄丸齋)라 이름하였고

마을이름을 이화동(梨花洞)이라 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서미마을을 돌아보며

목석거와 강린당에서 청음선생의 숨소리를 느낄수 있었고

서애선생의 흔적은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신양지에 세워진 유적비만이 전하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서미마을을 내려와

풍산읍을 지나 계평으로 돌아왔더니

계평마을앞에는 파크골프장에서 건강을 다지는 노익장들이 보였고

서산에 기우는 햇살을 받은 낙동강물과 우회도로 교량,

중앙선 철도교량이 더 아름담게 보였다.

 

오늘도 다정한분들과 신년인사를 나누며 맛있는 점심을 먹고

도청앞 천년숲에서 박정희 대통령 동상도 구경하였으며

서미리에서 서애선생과 청음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동행하신 서회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오늘 함께하신 모든분들이 더 건강하시고 더 즐거운 나날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