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경주 최부자집

오토산 2012. 7. 12. 10:19

 

 

* 창(春-日+臼+心)

才者無所施 --- 재자무소시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으며,

家室少完福 --- 가실소완복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 지도상릉지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翁嗇子每蕩 --- 옹색자매탕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婦慧郎必癡 --- 부혜랑필치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며,

月滿頻値雲 --- 월만빈치운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 화개풍오지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物物盡如此 --- 물물진여차
세상 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 --- 독소무인지
나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 걸.


경주 최 부자란 제목에 왠 사설이냐 하겠지만, 이 집안 역시 가실소완복(家室少完福 )이란 말처럼
완전한 복을 갖추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고 과거에 낙방하는 대
(代)도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오랜기간 부와 명예를 지키며 남들로 부터 칭송을 받
아온 연유는 무엇일까?

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하는가?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 경주 최
부자다.

경주 최 부자 집안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이 인상적인 그 집안의 가훈(家訓)이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
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 그것이다

'육훈(六訓)'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육연'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자처초연:自處超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대인애연:
對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다.

내가 경주에 머무른지 2달여 동안  틈틈이 몇 곳을 둘러보면서도 최 부잣집을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햇살 고운 5월 어느 날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일반적으로 " 경주 최 부잣집"
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 부잣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인지하게 되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
(忠義堂)"을 먼저 찾아가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경주 최 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
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장군이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
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평소의 생활도 청렴하였던 최진립은  이렇듯
일생을 장렬하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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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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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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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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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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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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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천년(千年)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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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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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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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과 행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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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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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
    (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최채량(崔採亮)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愚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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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
    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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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
    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
    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
    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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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부잣집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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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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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 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 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
    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
    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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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법주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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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다.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한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
    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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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 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않다.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랭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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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집 " 요석궁 "우측 길 끝 너머가 경주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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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 부자집의 300년간 내려온 부(富)의 비밀

 

아래 내력들을 자세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속담에 부자 3대를 못간다는 말이 있지요. 과연 그럴까요??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높고 귀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자신의 신분에 맞는사회적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진다는

 

2005년12월20일 (주)황금가지에서 발행하여 읽었던

경주 최부잣집의 富의비밀이라는 책을 올해 다시한번 읽었다.

 

1600년대 초 경주 지방에서 처음 가문을 일으킨 최진립장군에서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까지,

10대 300년 동안 거부로 이름을 떨친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

 

나는 어려서 가난하게 자라서인지 부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부지런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작은 부자로 태어날수 있다고

지금까지 나는 믿고 있는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12대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다.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나도 부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옛날 서울식품 사장님께 명절이면 인사를 다녔다..

옛 사장님께서는 유럽에도 집안의 富가

100년을 넘기기가 쉽지않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의

두산그룹역사를 공부하신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자료를 검토하다가 경주 최부잣집의

 부의 비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연말을 맞으면서 다시한번 읽었지만 감동은 잊을수 없다.

내년에 모 방송국에서 경주 최부잣집의 모델로 삼아

드라마로 제작한다고 하니 관심을 가지게 될것이다.

책내용을 보면서 나름대로 최씨 일가의 소박하지만

끊임없는 혁신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씨 가문은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존경받기는 어렵지만,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 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

진사는 일명 생진(生進)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았던

소과(小科)에 급제한 것을 일컫는다.

때문에 생원이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는

신분상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을 받는다는 의미가 컸다.

 

이를테면 생진과보다 더 높은 과거에

급제하여 권세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것은 마치 작두 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으므로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 되겠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부자집들이 70% 정도

받던 소작료를 40%로 낮추어 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으며,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윈-윈(win-win)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 전달자 역을 하던 과객들을 통해

최씨 집안은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는데,

‘적선지가(積善之家:선을 쌓는 집)’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해서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때 이북에서 내려오셨던분의 이야기를 들었던기억이 난다.

주위의 가난이에게 후하게 대접하였더니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죽을 목숨 이었지만 신세졌던

이웃의 도움으로 남한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는 이야기를...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흉년이 들면 수 천명씩 굶어 죽던 시대에,

흉년은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급하니까흰죽 그릇 얻어먹고 그 대가로

팔게된 논을 말하는''흰죽 논''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금기는 또 있었다.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 가 그것이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떨이’ 물건을 기다렸으나,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

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다.

그 다음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1000석은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남자가 아니라

안방 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 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또한,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준과 그의 둘째 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견딜 없고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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