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春-日+臼+心)
才者無所施 --- 재자무소시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으며,
家室少完福 --- 가실소완복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 지도상릉지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翁嗇子每蕩 --- 옹색자매탕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婦慧郎必癡 --- 부혜랑필치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며,
月滿頻値雲 --- 월만빈치운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 화개풍오지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物物盡如此 --- 물물진여차
세상 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 --- 독소무인지
나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 걸.
경주 최 부자란 제목에 왠 사설이냐 하겠지만, 이 집안 역시 가실소완복(家室少完福 )이란 말처럼
완전한 복을 갖추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고 과거에 낙방하는 대
(代)도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오랜기간 부와 명예를 지키며 남들로 부터 칭송을 받
아온 연유는 무엇일까?
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하는가?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 경주 최
부자다.
경주 최 부자 집안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이 인상적인 그 집안의 가훈(家訓)이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
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 그것이다
'육훈(六訓)'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육연'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자처초연:自處超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대인애연:
對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다.
내가 경주에 머무른지 2달여 동안 틈틈이 몇 곳을 둘러보면서도 최 부잣집을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햇살 고운 5월 어느 날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일반적으로 " 경주 최 부잣집"
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 부잣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인지하게 되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
(忠義堂)"을 먼저 찾아가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경주 최 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
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장군이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
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평소의 생활도 청렴하였던 최진립은 이렇듯
일생을 장렬하게 마쳤다.
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천년(千年)의 미소.......
충의당의 사당
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대문과 행랑채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
(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최채량(崔採亮)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愚山)'이다.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
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
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
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
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최 부잣집 안채
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 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 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
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
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교동법주 안채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다.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한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
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 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않다.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랭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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