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예의 본질(이면동)

오토산 2015. 3. 25. 11:03

 

 

 

예(禮)’의 본질

똘레랑스적인 ‘예(禮)’가 필요하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 어른을 만나서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부모님께 야단을 맞았다.

나 자신은 그 어른이 모르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어른들은 저 아이가 뉘 집 자식인가를 알고는

나중에라도 부모님이 알도록 해서 바로잡아 주셨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필자는 ‘예’란 인사를 잘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에 대해, 형식을 잘 갖추거나 인사 잘하는 것 정도로

여기면서 예가 우리 생활 주변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렇게 형식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예란 대체 무엇인가?

 

『논어』에서 예에 관한 대화 중 인상 깊은 곳은 「학이(學而)」편의 공자가 제자인 자공(子貢)과 예에 관해 대화하는 대목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선생님! 가난하지만 아첨하는 일이 없고, 부유하지만 교만을 부리는 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이]

대체로 가난하면서 심지가 굳지 못하면 부자나 권력 있는 사람 앞에서 아첨하는

 경향이 있는데 굽실거리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다면, 그는 매우 강직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부자이거나 권력을 쥔 사람은 교만해지기 쉬운데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는 부유하면서도 자랑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겸손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훌륭하지 않은가?

자공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대답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그것도 괜찮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가난한 사람이 강직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겸손한 데서 멈추지 않고 예를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슨 말인가?

가난한 이가 강직하고 부자가 겸손하다면 예를 아는 사람인데,

가난한 사람에게 즐거워하라 하고, 부자에게 예를 좋아하라니?

공자는 자공이 한 발언의 배경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상대에게 강직한 태도를 보이는 마음의 상태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자와 자신과의 ‘차이’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부자나 권력자 앞에서 굽실거리지 않으려는 것은 상대와 자신과의 사이에

벌어져 있는 부나 힘의 차이를 스스로 의식한 열등감 때문일 것이다.

아첨하지 않는 심리적 배경의 일부에는 그 차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다.

부자가 교만을 부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는 무엇일까?

가난한 자와 자신과의 차이를 의식하여 우월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부자나 권력자가 가난한 자나 약자에게 자신을 뽐내지 않는 것은 이미 상대와

자신 사이에 벌어져 있는 부와 힘의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겸손한 태도로 대하면서도 심리적 배경에는 우월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호례(好禮)가 출발한다.

가난하지만 도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은 이미 부자와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상대와 나의 차별심이 사라지게 되므로 자연히 안빈낙도할 수 있다.

 부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지 않으니 부를 제거해 버리면 상대와

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

따라서 상대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일 뿐이고, 상대와

나는 인격적ㆍ인간적인 대면만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다. 분명 가난한 자에게는

‘예(禮)’가 아니라 ‘낙(樂)’을,

 즉 낙도(樂道)할 것을 요구하였고, 부자나 권력자에게는 ‘예’를 요구하였다.

예는 부자나 권력자가 상대와 나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태도에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부자나 권력자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는 신분적인 차이가 있지만,

군주는 신분적 차이만 인정할 뿐 신하를 인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먼저이다.

자식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부모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먼저 사랑을 베푼다.

장유(長幼)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어른이나 선배가 모범을 보여야 젊은이나 후배들이 어른과 선배를 존중하고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는 별것 아닌 듯하고 형식적이라고

 생각한 ‘예’만 그르치지 않았다면 충분히 피해 갔을 법한 일들이 많다.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막말’ 사건과 ‘땅콩’으로 불리는 사건, 끝 간 데 없이

반대 방향으로만 치닫는 정치ㆍ사회적으로 닫힌 진영 논리의 갈등, 갑질 등이 그렇다.

우리 사회는 상대 인격에 대해 인정해 주는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믿음도 함께 무너지고 있다.

 

지도자와 국민, 경영자와 고용인,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지역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 이 모두가 ‘이(利)’만 존재하고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는 ‘예’를

 무시하는 풍조에서 나온 것들이다.

자신이 회사의 경영권자라 하더라도 직원은 자기 회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치는 상대 정당이 없으면 독재로 가기 쉽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의 극대화를 위해 자신이 고용하는 직원에게 업무와는

 상관없이 인격을 모욕하기도 하고,

정당의 이익을 위해 상대 정당을 흠집 내려 하며,

가게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의 기본 권리마저 뺏으려 한다.

이렇게 출발한 것들이 상대의 격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때로는 똑같은 방식의 응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상대에 대해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은 상대의 진면모나 진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태도에서 출발한다.

형식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형식 이전에 실질적인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에는 본디 똘레랑스적인 사고(思考)가 전제되어 있다.

 똘레랑스는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하여 나와

 다른 상대를 포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서구를 근대 이전에 양이(洋夷)라고 불렀지만,

그들 내부에는 예에 버금가는 ‘똘레랑스’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똘레랑스’는 알아도 예는 모른다. 왜 그런가?

서양 것이기 때문에 그런가? 예에는 이미 똘레랑스가 들어 있다.

그동안 우리는 예를 수없이 외쳐 왔다.

그러나 인사만 잘하는 예가 아니라 차별 없이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는 예를 말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적인 예를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누가 먼저 해야겠는가?

또한 우리는 낙도(樂道)할 줄 아는 사회 분위기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고전에서 현대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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