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홍수시대와 미의식의 혼란
진선미(眞善美)의 세 가지 가운데, 美의 문제만큼 복잡한 것이 없다. 우선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은 교육이나 훈련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 다른 가치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眞이나 善의 경우, 오랜 교육을 통해서만 피교육자 스스로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고 마침내 자발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서 자발적으로 생성되며, 어떤 경우에도 중단되는 경우가 없다. 죽을 때조차 아름답게 죽고 싶어하는 게 인간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한마디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가치를 얼마나 절대적인 것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美의 기준이나 분류에 관한 문제 역시 유사 이래 가장 골치 아픈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진이나 선의 가치와 연결되는 내적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이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만, 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색(美色)으로 인생을 역전시킨 경우도 많지만, 왕이나 재상이 미색에 빠져 나라가 기울어진 경우 역시 적지 않았다.
어쨌든 필자가 보기에는 역사는 대체로 외적인 아름다움의 추구에 대해 점점 폭넓게 인정하고 용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도덕적인 비난을 면키 어려웠을 성형이며 미용의 여러 방법들이 사회적으로 용인 되는 것이 이런 추세를 반증한다. 하지만 아무리 외적인 아름다움의 추구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끊임 없는 분란의 소지가 되고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인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아름다움에 관한 <주역>의 입장 또한 다른 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쾌하지가 않다. 꾸밈과 치장은 작은 일에 관계되는 것이지 큰일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내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시시하다는 생각도 든다. <주역>을 쓴 기자의 미의식과 훨씬 후대에 이를 재해석해야 하는 필자의 미의식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