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97

두루종택의 뚝향나무

두루종택의 천연기념물 뚝향나무 송안군 이자수가 청송 파천에서 마애(마라촌)로 이주하면서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가 된다. 만년에 두루(周村)로 옮겨 살다 아들 부정공 운후가 종택을 창건한다. 운후의 아들 참판공 정(禎)이 원종공신으로 추대되면서 불천위로 봉향돼 대종가를 형성하였다. 이분이 바로 퇴계의 증조부다. 이정은 세종 때 정주판관으로 영변의 약산산성 증축공사에 참여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월의 시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의 바로 그 영변이다. 약산산성 공사가 끝나고 1434년 귀향길에 오르면서 약산의 향나무 3그루를 가지고 왔다. 한 포기는 두루 본가 앞마당에 심고, 한 그루는 온혜로 분가한 셋째 아들 계양에게, 나머지 한 그루는 사위 박근손에게 나눠주었다. 이 모든 내력이 ‘노송정기’에 기록..

선조를 찾아서 2013.03.13

지역성씨 게통소고

안동 1.진성이씨: 두루(주촌)-와룡면 주하동 이정 송간 이정회/낙금헌 이정백 도산면 온혜(노송정 이계양) 송재 이우 온계 이해 상계(퇴계) 하계(동암 이영도) 토계 계남 원촌 단사 의인 부포리 원천 반초당 이명익/ 봉화 녹동 노루골 난은 이동표 풍산 마애: 호봉 이돈, 석봉 이회보-우율승무 찬성,서인 일직 송리: 학천 이봉춘, 후산 이종수 의성 사곡면 오동 토현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정권을 장악한 것에서 더 나아가 학문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에 영남 남인들은 우계는 임진왜란 당시의 출처와 기축옥사(정여립란)의 처신을, 율곡은 신사임당 사후 금강산 입산 승려생활을 문제로 하여 문묘에 배행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소수蔬首가 무실의 백졸..

선조를 찾아서 2013.03.11

안동양반과 퇴계학맥을 찾아서

안동양반과 퇴계 학맥을 찾아서--- 1.안동양반이란 안동을 양반(兩班)의 고장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동을 정말 양반의 고장이냐 아니냐로 인식했다기보다는 관습적으로 안동하면 양반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뭘까? 안동은 언제부터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안동의 양반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다 보면 안동의 유교문화의 맥이 잡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양반은 누군가 양반이란 말은 원래 고려시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지칭하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양반이란 말이 지배신분층을 가리키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이후 양반이란 말은 사대부란 말과도 같이 사용되었고 또 사족(士族)이라고도 하였다...

선조를 찾아서 2012.11.22

진성이씨의 분파

李殷植 眞寶(眞城)李氏의 분파(分派)와 대현(大賢)의 현달(顯達) 글쓴이: 周村宗門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編) 謹識 우리 眞寶(眞城)李氏 시조부군(始祖府君)의 姓은 李氏이고 휘(諱)석碩이십니다. 경북 진보현(眞寶縣)에서 대대로 고을의 호장(戶長)을 지낸 향리(鄕吏)가문(家門)에서 출생(出生)하신 분으로 고려말 충렬,충선왕 때의 인물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그 시기(時期)는 고려말高麗末 (원종元宗11년1270年頃)이나,충렬조忠烈朝(충렬1년1275年-충렬6년1280年,또는 충렬16년1290年)頃으로 추측(推測)해 볼 수 있으며, 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忠惠),충숙,충혜,충목조(忠穆朝)를 지내셨던 분으로 추정(推定)됩니다. 진보의 이촌(李村)은 우리 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 생원공(生員公)께서 ..

선조를 찾아서 2012.05.22

진성이문 국보및 문화재

관리자 眞城李門 文化財[2].hwp 46 Kbyte 眞城李門 國寶 및 文化財,齋舍,樓亭 眞城李門 國寶 및 文化財,齋舍,樓亭 국보 제70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1940년 경북 안동(安東), 진성이씨(眞城李氏) 두루종택(周村宗宅)에서 발견되어 전형필 (全鎣弼)씨가 소장(所藏)하게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국내 유일본, 1962년 12월 20일 국보(國寶)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목판본(木版本)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1, 1.보물 ◇ 퇴계선생필법1책 및 유첩 분 류 : 문서 지 정 : 보물 제548호 (1971. 8. 3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안동시 서후면 교리리 207 2, 사적 ◇ 도산서원 [陶山書院] 분 류 : 서원 지 정 : 사..

선조를 찾아서 2012.05.22

진성이씨 유적

관리자 眞城李氏 遺蹟(진성이씨 유적)-旌閣.碑.遺址.遺品 眞城李氏 遺蹟(진성이씨 유적)-旌閣.碑.遺址.遺品 진성이씨 유적-정각.비.유지.유품 3.정각(旌閣):효자정각[孝子旌閣] ■李允貞 孝子閣(孝行):1516年 建立 경북 영주시 풍기군 안정면 생현리 소재 4.비(碑):묘비(墓碑).비각(碑閣).유적비(遺蹟碑) ■始祖 生員 贈 密直使 諱 碩-墓碑 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기동(기곡) 소재 ■高麗 松安君 眞城李公之墓-墓碑 경북 안동군 서후면 명동(두실원) 소재 ■眞城李氏李村遺蹟碑閣 (始祖 生員公 贈 密直使 李 碩) 경북 청송군 진보면 이촌동 소재 ■松安君 遺蹟碑 경북 안동군 서후면 명동(도솔원) 소재 ■松安君 遺墟碑 경북 안동군 풍산읍 마애동 소재 ■善山府使 李禎公 善政碑 韓山.善山府使 歷任時 善政 ■溫溪 李瀣先..

선조를 찾아서 2012.05.22

진성이씨 유적

관리자 眞城李氏 遺蹟(진성이씨 유적)-齋宇 眞城李氏 遺蹟(진성이씨 유적)-齋宇 글쓴이: 周村宗門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1.재우(齋宇)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선생 배향(配享)...제향(祭享) 1.도산서원[陶山書院] -1574年(선조7)에 대유(大儒)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선생의 학덕(學德)을 추모(追慕)하는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상덕사(尙德祠)라는 사묘(祠廟)를 세우고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창건(創建)한 서원(書院) 지정번호 : 사적 제170호 지정연도 : 1969년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시대 : 조선 선조7(1574年) 크기 : 동서재(東西齋)-홍의재(弘毅齋),박약재(博約齋) 정면 3칸 측..

선조를 찾아서 2012.05.22

진성이씨 유적(제각)

관리자 眞城李氏 遺蹟-齋閣 (진성이씨 유적-재각) 眞城李氏 遺蹟(진성이씨 유적)-齋閣 글쓴이: 周村宗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2.재각(齋閣):재사(齋舍) 始祖 墓所-守護 齎舍.齋室.齋宮(재사.재실.재궁) ■기곡재사[岐谷齋舍] 1세-(諱)석碩:[고려말 충렬-충숙조] 진보현리(眞寶縣吏),생원(生員) (贈)밀직사密直使 ■시조묘소[始祖墓所]:청송군 파천면 신기동 산7번지 癸坐(岐谷)소재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巴川面) 신기리(新基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사 지정번호 : 경북문화재자료 제291호 지정연도 : 1994년 9월 29일 소유주: 진성이씨 문중(眞城李氏 門中) 소재지 : 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427번지(감남) 소재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사묘재실(祠廟齋室) 파천면 신기리에 위치한 기곡재사(岐谷..

선조를 찾아서 2012.05.22

안동파 항열자

李殷植 眞城李氏 安東派 行列字(진성이씨 안동파 항렬자 15-28세까지) 글쓴이: 周村宗門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編) 謹識 ■주촌종파周村宗派의 支派와 分派祖 연곡파淵谷派(諱)정수庭樹 -分派영산파寧山派 번곡파蕃谷派(諱)윤황胤黃 주촌파周村派(諱)희옹希雍 [樂琴軒系] 정로위공파定虜衛公派(諱)희윤希尹 -分派아호파鵝湖派 이동파李洞派(諱)희열希說 ▲일직파一直派(諱)한漢 -分派대곡파大谷派,모계파慕溪派 정자동파亭子洞派(諱)희맹希孟 사곡파舍谷派(諱)희정希程 -分派송곡파松谷派 ▲이계파伊溪派(諱)감堪 구로동파九老洞派(諱)형남亨男:송계松溪 귀천파龜川派(諱)호남好男 ▲호동파虎洞派(諱)종 ■眞城李氏 安東派 行列表 주촌종파(연곡파,번곡파,주촌파,정로위공파,이동파) 일직파(대곡파,모계파) 정자동파 사곡파(송곡파) 이계파(구로동파,..

선조를 찾아서 2012.05.19

1600년 족보

이한방 1600년 간행 「진성이씨족보」의 편찬과정과 그 성격-2: 김문택/ 이동언 옮겨 씀 3. 「진성이씨족보」의 간행과 그 특성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가계 정리 작업은 그의 사후, 아들 자손들에 의한 족보의 편찬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1600년 도산서원에서 자손들의 주도로 목판본「진성이씨족보」가 간행되기 오래 전에 이미 족보가 만들어진 바 있다. 이는 1571년 이황이 사망하고 10여년이 지난 후인 1583년 그의 아들 준(寯, 1523~1583)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이 때는 필사본 형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다시 준이 사망한 이후, 퇴계의 손자 영도 등의 주도로 1600년 도산서원에서 목판본 「진성이씨족보」가 만들어졌다. 1600년 경자년에 간행된 「진성이씨족보」의 특징은..

선조를 찾아서 2012.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