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02-(64)
*김삿갓을 향한 여인의 연정 (戀情)
달빛에 얼굴을 살펴보니,
그 여인은 필봉의 누이동생으로 홍 향수의 소실인 여정이었다.
"아, 오래간만 입니다. 오라버니 댁에 다녀가시는 길입니까 ? "
김삿갓은 의례조의 인사말을 건넸지만 여정은 깊은 감회에 잠긴 사람처럼
아무 말도 안하고 한동안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더니 문득,
"그동안 삿갓 선생님을 무척 뵙고 싶었어요."
하고 뜻밖에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삿갓은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인의 고백에서 뜨거운 연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여정은 유부녀가 아니던가.
이런 호젓한 달밤에 자칫,
유부녀와 가까이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일순, 그런 불안감이 스치자 자기도 모르게,
"참, 향수 어른의 병환은 요즘은 어떠십니까.
지난번 필봉 선생이 지어드린 보약을 잘 드시고 계시고요." 하고
화제를 의식적으로 딴데로 돌려 버렸다.
여인은 고개를 수그린 채 또다시 오랫동안 말이 없더니
김삿갓의 물음에는 대답조차 아니하고,
"저는 그동안 삿갓 선생님을 무척 뵙고 싶었다는 말이예요."
하고 아까와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뇌까리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목석이 아닌 이상,
여정의 가슴속에 사무치는 정회(情懷)를 못 알아 들었을리 없었다.
(이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나를 연모하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삿갓은 눈앞의 여인을 힘차게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나 김삿갓은 또다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안 된다. 이 여인은 향수 어른의 소실이다. 이 여인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
훈장 노릇도 못하고 쫒겨나게 될 것이 뻔한 일이다.)
훈장 자리에 미련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유부녀와 간통을 하다가 쫒겨나는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발길을 돌리는 자세를 보이며 말을 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 늦기 전에 어서 댁으로 올라가 보시죠."
그러자 여인은 몹시 원망스런 어조로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삿갓 선생은 저를 만나 주시기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 "
김삿갓은 점점 입장이 난처해졌다.
"부인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부인은 향수 어른의 사모님이고, 저는 일개 훈장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이에 만나는 것이 싫고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김삿갓이 사모님이라는 말 까지 써가며 방어선을 쳐보아자,
여정은 갑자기 앙탈스런 말을 한다.
"저는 사모님이라는 말은 듣기조차 싫어요."
여정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접근해 오는 바람에,
김삿갓은 오히려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여인의 말을 농담으로 슬쩍 받아 넘기는 대꾸를 했다.
"사모님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신다니,
그 말은 쓰지 않기로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한밤중에 길가에 오랫동안 마주서 있으면
누가 무슨 곡해를 할지 모르니까, 어서 올라 가시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좀체 발길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면 어때요. 삿갓 선생은 저와 만나기가 싫으셔서 ,
일부러 그런 핑계를 대는 게 아니에요 ? "
김삿갓은 웃을밖에 없었다.
"허허허, 내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여사를 싫어하겠소이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여사에게 누(累)가 미칠까 싶어 조심을 하는 것이지요."
여정은 그 말을 듣고 토라졌던 마음이 한결 풀리는지,
"선생이 그런 심정으로 저와 만나기를 조심하신다면
저도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 하겠어요.
그러나 제가 선생님을 무척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어요."
하며 또다시 연정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여사의 심정을 어찌 모를 리가 있겠소이까.
그러나 사사로이 만나서는 안 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남의 눈을 피해가며 만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 아니겠어요 ?
그런 점은 피차간에 삼가해야 할것 입니다."
"글쎄요.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많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어요.
그러나 견디기 어렵도록 그리워진다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 "
"사람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참을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선생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여정은 이제야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 듯,
걸음을 옮겨 자기 집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김삿갓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멀어져 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불쌍한 여인 !)
생각하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여자다.
스무 살이라는 꿈많은 나이에 칠십 고령인 홍 향수의 소실 노릇을 하자니,
무슨 신통한 일이 있을 것인가.
밥 걱정 없는 것은 다행한 일이 될지는 몰라도 ,
사람이 밥만 먹는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계속 2-65회로~~~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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