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선비들의 영원한 이별의 글

오토산 2024. 3. 12. 18:20
● 불원재 유교문화 해설(142)
【선비들의 영원한 이별의 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영원함이 없다,
그러나 자연의 운행은 영원하다 이를 일러 도(道)라고 한다.
자연의 운행은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영원히 순환하여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남이 있게 된다.
끝남이 또 다른 시작이요 시작이 곧 끝남인 것이 도인 것이다.
 
한민족의 전통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 우주가 시작 되었지만 이 우주가 처음이 아니다,
우주가 끝나지만 이 우주가 끝남이 아니다(一始无始一, 一終无終一)라고 하였으니 자연의 운행은 영원하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인생 무상(無常)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생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고 인연을 맺으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 친지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한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을 하게 되면 남아있는 많은 가족과 친지들은 그 사람과 함께했던
희로애락의 삶의 인연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나이들어 병들고 죽게되면 바로 장례식장으로 직행하고,
장례절차도 간소하여 삼일 이내에 상,장례절차가 모두 끝나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 사람들은 짧은시간 문상으로 망자와 이별할 뿐이며
그와 함께했던 깊은 삶의 인연을 남겨서 전달할 기회가 없다.
 
전통사회에서는 초상(初喪)을 당하면 장례 이전에 빈소(殯所)를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망자와 인연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조문(弔問)하고 떠나보내는 안타까움과 서러운 마음을
짧은 글을 지어 망자와의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이때 이별의 슬픔과 망자의 삶을 회고하는 글을 써서 빈소 병풍에 걸어두었다가
장례날 상여 앞에 깃발로 들고 가는 것이 만장(輓章)이다.
 
초상 장례가 끝나고 난 뒤에도 미처 조문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상기(喪期)가 끝날 때 까지 빈소를 철거하지 않고 주인은 조석으로 음식을 올린다.
1년 주기에 다시 소상, 대상 날을 당하면 제례의식으로 망자를 추모하게 되는데
이때 친지들이 제례에 참석하여 망인의 삶의 행적과 자신과의 인연을 글로 지어 추모하는 글이 제문(祭文)이다.
 
상기가 끝나면 가족들은 만사와 제문등을 수습하고 망자의 일생과 삶의 이력을 서술하여
후세에 남기는 글이 행장(行狀)이며,
이 행장을 바탕으로 하여 명사(名士)나 문사(文士)의 글을 받아 묘소앞 빗돌에 새기는 글을 묘갈명(墓碣銘)이라고 한다.
 
이러한 한사람의 일생을 회고하는 글과 자료를 남김으로서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과 같이
육신은 죽고 없어지지만 삶의 흔적이 살아있어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되고,
그 사람과 교유(交遊)하였던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하여 후세들의 인연과 관계를 영원히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지만 이러한 글을 남김으로서 후세와 교감하면서 영혼은 죽지않고
또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는 부고가 고별통지가 되어 문상은 하지 않으면서 부의금을 송금하는 것으로 망인과의 이별이 되는
각박한 세태에 전통사회의 만장과 제문등을 보내는 상.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한자로 지어 지는 문장이 아니라 한글로 쓰여지는
이별의 글 한줄이라도 전해지는 미풍이 되살아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과 마음으로 애환을 함께하던 것이 전통사회의 미덕으로
그 중에서도 사람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마음으로 위로하고 망인의 일생을 칭송했던 만장과 제문은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동안 지켜온 선비들의 수준높은 이별의 문화였다.
 
○ 만사(輓詞)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서 상여가 떠날 때 망인이 살았을 때의 업적을 기려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인도한다,
또는 상여를 잡고 간다는 뜻으로 만사라고 한다.
만(輓)이란 상여앞의 받침나무(輓)를 이끌며 애도(哀悼)한다는 뜻으로 이끈다는 만(挽)자와 같은 의미이다.
만사의 규격은 일정하지 않지만 주로 한시체 오언절구와 오언율시 또는 칠언절구와 칠언율시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고시체를 본떠서 장문시의 글을 짓거나 넉자체로 써서 만시(挽詩)라고도 한다.
 
○ 만장(輓章)
상여가 떠날 때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만사(輓詞)를 종이나 천에 써서
상여 앞,뒤에 들고 장지로 향하는 깃발을 말한다.
만장은 많은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경건한 마음과 정성이 들어 있어서
가난한 선비들에게는 글로서 슬픔을 전했던 문상품이었고,
돌아가신 분에게는 만장의 수가 곧 생전에 쌓은 학덕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장례절차의 간소화와 매장 및 상여풍속이 없어져서 이제는 만장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 만가(輓歌)
만가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상여를 매고 가면서 부르는 노래, 즉 상여소리를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친척이나 친구가 죽으면 상여의 뒤를 따라가며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만가(輓歌)라고 했으며,
옆에 따르던 사람이 받아 기록한 것이 만사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한 고조로 즉위하기 직전의 일이다.
제나라 왕 전횡(田橫)은 한신에게 습격당한 분풀이로 화친을 맺으러 온 유방의 사자 역이기(酈餌其)를 삶아 죽여 버렸다. 그후 유방이 즉위하고 보복이 두려원 전횡이 자결하자 5백 명의 부하들도 전횡의 절개를 기리면서 모두 자결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울지는 못했지만 슬픔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슬픈 심정을 담은 노래(輓歌)를 지어 자신들의 마음을 대신했다.
뒷날 사람들이 이것을 널리 퍼뜨려 해로호리가(薤露蒿里歌)라고 했는데
그것이 관례가 되어 죽은 자를 보낼 때 부르는 노래를 해로가(薤露歌)라 한다.
 
○ 제문(祭文)
망인의 상기(喪期)중 제사를 올릴 때 읽는 고문(告文), 축문(祝文)으로 친지가 망인의 일생과 행적을 기록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며 뇌문(誄文)·애사(哀辭)·조문(弔文) 등도 모두 제문이라 할 수 있다.
제문의 유래는 당초에는 망인의 명복을 비는 기원문이었으나
점차 관심의 대상이 인간으로 옮겨가면서 망인의 일생을 서술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긴 글의 제문이 조선시대에는 성행하였다.
 
○ 묘갈명(墓碣銘)
묘갈명이란 상기(喪期)를 마친후에 고인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하여 묘소앞에 세우는 빗돌에 새기는 글을 말한다.
묘갈명은 망인에게 보내온 추모의 글과 평소의 삶을 망라하여 고인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작성하고
당대에 명망있고 글 잘하는 선비를 찾아가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여
보통 100자이내의 축약된 명문(銘文)을 받게 되면 빗돌에 새겨 선비의 일생을 영원히 추억하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묘갈명은 망자의 삶 중에서 두드러진 사회적 업적과 학문을 찬양하는 글이 대부분이어서
퇴계선생은 자신의 일생이 과장될 것을 두려워하여
오직 학문을 추구하고 소박한 일생을 겸허하게 서술한 자명(自銘)을 남겼는데
고봉 기대승(奇大升)의 묘비 서문과 함께 퇴계선생 자명이 묘비에 새겨졌다.
 
○ 퇴계 16대종손 별세
지난주 3월7일 퇴계선생의 16대종손 이근필(李根必, 1932~2024)옹이 93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평생을 퇴계종손이라는 굴레에 얽매어 퇴계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기진(氣盡)된 유교의 명맥(命脈)을 이으며
고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선비의 삶을 살아온 퇴계종손의 일생이 현대사회에 보기드문 일이라
언론과 방송에 조명을 받고 있다.
 
고 이근필 종손의 자는 성유(聖幼)이고 호는 청하(靑霞)이며 퇴계선생의 심학 가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누대(累代)로 종손의 이름은 마음 심(心)자가 들어있다.
일찍이 교육계에 입문하여 초등교장으로 정년후에 2001년 ‘퇴계선생탄신500주년행사’를 계기로
유교문화 계승을 위한 후손들의 결집체인 문중운영회와 유림사회 단체로 박약회(博約會), 도운회(陶雲會),
도산서원운영위원회를 결성하고 500주년행사를 성공리에 개최하여 퇴계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국내외에 알리고
멸실된 도산학림(陶山學林)의 유적복원에 온 힘을 기우렸다.
 
서원의 역할은 선비를 기르는데 있다는 소신으로 도산서원에 선비문화수련원을 개창한 이래
지금까지 135만명의 사회교육실적을 거양하였고
도산서원의 재유사강독과 거경대학운영, 도산서원방문객 참알기 안내, 퇴계학 연구학자들의 참공부 운영등
사회교육에 이바지한 공로가 참으로 크다 할 것이다.
 
종손의 별세를 안타까워하여 전국의 유림과 종손, 친지와 후손, 사회 각단체에서 문상객이 5일간 줄을 이었다.
12일 장례는 종택에서 가까운 뒷산 먼저 간 종부옆에 합장하였다.
병원에서 발인하여 종택앞에서 노제(路祭)를 지내고 상여(喪輿)에 태워 명정(銘旌)을 앞세우고
추모객의 만장과 조객(弔客)들의 애도 속에 전통장례의식으로 장례를 마치고
여막(廬幕)을 설치한 종택에 빈소를 마련하여 상장례 의식절차를 마무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