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율곡기념관을 다녀와서
오죽헌 탐방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율곡기념관을 찾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선생은
1536년 12월 26일 오죽헌 몽룡실에서 이원수공과 신사임당 사이
칠남매중 셋째아들로 태어나 세살때 말과 글을 익혀
열살때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열여섯살때 어머니를 잃어
삼년 시묘살이후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공부를 하다가
스무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자경문을 지어 立身行道할 것을 결심하였고
스물두살 상주목사 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세살 진사초시를 시작으로 아홉번의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九度壯元公으로 불리었고 사헌부대사헌, 예문관직제학, 사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서른세살때(1568) 서장관으로 북경을 디녀오기도 하였으며
백성을 근본으로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萬言封事를 지어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동호문답과 성학집요를 지어 군왕의 도를 개진하였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며 향약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社倉제도를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으며 정계를 떠난 후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워 후진양성을 하면서 격몽요결을 저술하였고
1584년 세상을 떠나 40년뒤인 1624년 인조대왕이 시호를 내렸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媤任堂, 姙師齋로도 불렸고 남편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
10년간 떨어져 살며 학문에 정진토록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남편의 나약함에 실망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되겠다며 학업에 전념토록 하였고
서른세살때 선녀가 동해바다에서 살결이 백옥같은 흰 옥동자를 안고 와서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검은룡이 침실 문머리에 서려있는 꿈을 꾼
다음날 율곡을 낳았으며 시문과 그림에 소질이 있어
일곱살때 안견의 그림을 따라 그렸고
38세때 '유대관령망친정'이란 글을 썼다고 하며
풀벌레를 그린 그림을 말리기 위해 내어 놓았더니 닭들이 쪼았다는 이야기와
빌린 옷에 얼룩이 묻어 치마에 포도그림을 그려 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신사임당의 맏딸인 매창(梅窓 1529~1592)은
어머님의 가르침을 따라 여성의 규범을 지켰고 경전과 사기에도 능통하였으며
율곡이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매창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고 그림솜씨가 뛰어나
참새, 설경과 새, 달과 새 등 서정적인 작품과 묵매도를 남기기도 하였다.
넷째아들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는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비안현감, 괴산.고부군수를 거쳐 군사감정에 이르렀고
詩, 書, 畵, 琴 모두를 잘 한다고 하여 4절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포도, 초충, 게, 매화, 난초, 국화 등 다양한 그림과 묵란도, 묵국도 등을 남겼으며
사임당의 영향을 받아 단아한 서풍을 구사하다가 황기로의 사위가 된 이후로
장인의 서풍을 수용하여 현달하고 방일한 서풍을 선 보였다고 하며
송시열이 '옥산의 서풍은 정묘하고 웅건하여 용과 뱀이 날아 올라가는 것 같아
글씨를 얻는 자는 값진 보석보다 더 귀중히 여겼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율곡기념관에서 신사임당과 자녀들에 대하여 알아 보며
남기신 고귀한 작품들도 구경을 하였으며
우리는 기념관을 나와 옆에 있는 화폐박물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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