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안동의 명물 "맘모스제과"(처음처럼작)

오토산 2013. 10. 23. 03:08

 

 

 

 

 

 

 

 

 

 

 

 

 

 

 

 

 

 

 

 

 

 

 

 

 

안동 명물 '맘모스제과' 첫 서울 나들이

[중앙일보] 입력 2013.10.18 00:02 / 수정 2013.10.18 00:02

우리 빵 키운 건 8할이 재료

    맘모스제과 이정우 대표가 갓 구워낸 크림치즈빵을 들고 있다.

 

경북 안동의 명물 빵집 ‘맘모스제과’가 지난 7∼13일 첫 서울 나들이를 했다. 서울 잠실동 롯데호텔월드 ‘델리카한스’에서 진행한 ‘맘모스제과 초청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1974년 문을 연 맘모스제과는 대전 성심당, 군산 이성당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지역 빵집으로 꼽히는 곳이다. 그동안 서울의 여러 백화점·호텔 등에서 초청행사를 제안받았지만, 실제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정우(38)맘모스제과 대표는 “맘모스제과 직원 수는 점포 하나 운영하기에 딱 맞는 정도다.

직원을 빼내 다른 곳 행사를 치를 여력이 없다. 그런데 롯데호텔에서 이곳 베이커리 직원들이 다 매달려 해보겠다고 제안하더라. 나만 올라와 ‘델리카한스’ 직원들과 함께 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맘모스제과 이석현(68)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이 대표는 “재료와 만드는 법이 다 공개된 셈이지만 괜찮다”며 덤덤해했다. 어차피 타 지역에 지점을 낼 계획이 없는 맘모스제과엔 남과의 경쟁이 무의미한 모양이었다.

재료 구하고 손질하는 게 가장 큰일

“아버지는 빵을 못 만드셔요. 기술 없이 빵집을 하셨지만 늘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셨죠. 맛이 ‘100’이면, 재료가 ‘80’이고 기술과 아이디어가 각각 ‘10’씩이라고 하셨거든요.”

경영자는 빵맛의 80%를 차지하는 재료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좋은 재료를 쓰겠다는 경영 원칙이 확고하다면 기술자가 바뀌어도 빵맛엔 큰 차이가 없게 된다. 그 철학이 맘모스제과의 40년 역사를 만들었다. 단호박·밤고구마·홍옥·마 등 안동의 제철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반조리 제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재료 구하고 손질하는 게 제일 큰일이에요. 단호박 삶고, 고구마 씻어 깍둑썰기 해서 조리고, 사과 껍질 까고…. 최고급 생크림 쓰고 효모 키워 발효시킨 빵맛이 좋을 수밖에요.”

여기에다 이 대표는 아버지에게 없었던 기술까지 갖췄다. 가업을 이을지를 두고 고민 중이었던 2000년 무렵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파티시에 대회’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각국의 대표 파티시에들이 모여 제과·제빵 기술을 겨루는 자리였다.

 
“이거 진짜 예술이구나 생각했어요. 공예를 비롯한 예술적 요소가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 장르란 걸 알게 됐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이 대표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우선 맘모스제과 주방에서 기본 기술을 익힌 뒤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유학이라 해서 요리학교를 찾아간 건 아니었다. 일본의 유명 제과점인 교토의 ‘라미드빵’과 후쿠오카 ‘주로쿠’에서 일을 하며 현장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배운 것도 재료의 중요성이에요. 아몬드 하나를 쓸 데도 어디에서 재배한 아몬드가 좋은지 공부해서 쓰더라고요.”

동네빵집 맛, 대기업이 못 따라와요

이번 초청전 기간 동안 롯데호텔월드에서 팔린 맘모스제과 빵은 모두 5만여 개. 준비했던 빵 포장지가 동이 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특히 크림치즈빵 등 몇몇 인기 빵은 굽기가 무섭게 팔려나가 시간을 못 맞춰온 손님들은 맛도 보지 못했다.

안동에서도 맘모스제과는 늘 빵이 모자라 못 판다. 이 대표가 “어떤 날은 오전에 빵이 다 팔려 오후 내내 빵집 문 열어놓기 민망한 때도 있다.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양이 한계가 있어 무작정 많이 만들 수가 없다”며 고충을 토로할 정도다. 맘모스제과에도 위기는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다.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무섭게 그 세를 확장시켜 가던 때였다. 주변 동네빵집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손님들이 몇십m씩 줄 서서 빵을 샀다던 전설의 빵집, 맘모스제과도 타격을 받았다. “안 팔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빵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도 이 대표는 프랜차이즈 빵집의 물량 공세를 비난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프랜차이즈 빵집의 맛과 디자인이 동네빵집보다 나았기 때문이에요. 70∼80년대는 동네빵집이 그냥 돈을 벌었던 시대라고 봅니다. 문만 열면 장사가 됐으니까요. 그러다 준비 탄탄하게 하고 뛰어든 프랜차이즈 빵집에 밀려난 거죠.”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는 게 이 대표의 분석이다.

“실력 있는 ‘선수’들이 굉장히 많아졌어요. 신선한 재료를 그때그때 손질해 사용하고 천연 효모를 자유자재로 다뤄가며 만든 동네빵집 맛을 대기업 제품이 따라갈 순 없죠. 아무리 실력 있는 기술자라도 대량 생산하려면 기계에 맞게 레시피를 고쳐야 하거든요.”

첫 초청행사를 성공리에 마무리한 이 대표에게 서울 분점 얘기를 슬쩍 꺼냈다.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서울에도 맛있는 빵집이 많은걸요.”

글=이지영 기자
사진=신동연 신임기자

 

 

************

 

 

[Biz스토리(25)]  

 

'40년 전통 名家'

 

맘모스제과, 그 '선명한 맛'의 비밀…

 "사람이 곧 맛"

입력
2013-10-11 13:12:40
수정
2013-10-11 16:40:25
트위터로 보내기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요즘으로 보내기 C로그로 보내기
끝모를 불황의 터널에서도 남다른 노력과 혁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우뚝 선 성공기업들의 숨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한경닷컴 산업경제팀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발굴한 기업들의 생생한 성공스토리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도전과 위로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편집자 주>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고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1970년대. 경제위기 탓이었는지 이 시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제과점의 중흥기였다. 특히 대구의 동성로. 이곳의 젊은이들에겐 뉴욕제과, 런던제과, 뉴델제과 등지가 일명 '가장 핫(hot)한 만남의 장소'였다. 빵집이 어디에 있던 붐비지 않는 곳이 없던 그런 찬란한 시대였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빵집'의 아성은 20여년 만에 맞닥뜨린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곤두박질쳤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전국에 수많은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대형 자본이 개입한 '프랜차이즈'가 나타나 이들을 대거 가맹사업자로 흡수한 것이다. 이후로 대기업 간판이 골목상권을 파고들면서 동네 빵집은 그 어디에도 디딜 곳을 찾지 못했다.

전장에도 꽃이 피어나듯 그래도 숱한 경쟁을 물리치고 동네 빵집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곳도 있다. 40여년이 지나자 이젠 '명물 빵집'으로 불린다. 대기업들이 앞다퉈 모시고(?) 광고해야 할 '명품 빵집'으로 대접받고 있다. '선명한 맛'과 '제철 재료'만 고집해 온 안동 맘모스제과 역시 그 주인공이다.

창업 40주년을 불과 3개월 남짓 남겨두고 있는 맘모스제과는 2년 전 전세계 맛집 가이드북인 '미슐랭 그린 가이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빵집으론 국내 첫 번째 등재였다. 이곳은 이미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성당(군산), 성심당(대전)과 함께 전국 3대 명물 빵집으로 꼽힌다.

이정우 맘모스제과 대표(38·사진)는 아버지인 이석현 창업주의 뒤를 이어 15년째 이 명물 빵집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 물려받자마자 '최대 위기'…대기업 빵집 물밀듯 쏟아져

맘모스제과는 1974년 창업주인 이 대표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안동으로 건너와 빵집을 세운 것이 시초가 됐다. 제과점 전성기였던 70~80년대 맘모스제과는 주방에만 30여 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잘 나갔다.

맘모스제과는 1990년대 말 큰 변화를 맞았다. 셰프 겸 오너를 둘째 아들인 이 대표가 넘겨받은 것. 제과점에서 대표 셰프의 변화란 제과점의 운영 방향과 레시피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사항이란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맘모스제과는 이와 동시에 큰 위기를 맞았다. IMF 경제위기가 오면서 실직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됐던 것. 이들이 새롭게 뛰어든 곳은 다름 아닌 프랜차이즈 빵집들이었다. 대기업이 운영한다는 소식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던 사람들은 브랜드를 믿고 자신의 퇴직금을 기꺼이 맡겼다. 이들 덕분에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등 대기업 소속의 빵집들은 이 시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요. 안동에도 한 달에 2~3곳씩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생기기 시작할 정도로 무섭게 늘어났죠. 인근에 있던 동네빵집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고요. 맘모스제과도 많이 팔아야 본전을 하던 때였어요. 아버지로부터 가게를 이어받은지 6개월이 채 안됐던 시기였는데 장사가 갑자기 안되니까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IMF 경제위기와 상관없이 아버지 땐 없어서 못 팔던 케익들이 줄줄이 남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해 제빵 경험이라곤 전무했지만 핑계를 댈 순 없었다. 이 대표는 준비가 안된 채로 가게를 이어받았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 식은땀만 흘렸다.

"제가 아침에 만든 케익들이 저녁이 되면 전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어요. 케익은 당일에 팔지 못하면 다 버리거든요. 정말 참담했죠. 그래도 이름은 대표 셰프인데 이것 밖에 못하나 자괴감도 들었고요. 그동안 아버지가 일궈왔던 것을 내가 다 망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창업주인 아버지는 자신의 가업을 물려받은 둘째 아들의 기 살리기에 나섰다. 당장에 성과가 없더라도 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제빵이라곤 배워본 적이 없는 아들에겐 더 그랬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유학이었다. 이 대표는 짐을 싸서 곧바로 일본으로 떠났다.

◆ 일본에서 만난 스승의 가르침… "맛을 선명하게 내라"

이 대표는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와는 다른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선 학교보단 실전에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제빵업계에서 제일 가는 셰프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일본 제빵업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공통된 이름이 한두 명씩 나오더라고요. 후쿠오카에 가면 주로쿠라는 빵집에 70세가 넘는 셰프가 있는데 전통을 중시하는 그분의 철학이 저희 맘모스제과와 가장 잘 맞겠다 싶어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한국에선 잘 나가는 빵집의 2세 오너였지만 후쿠오카에선 이 대표가 누군인지 알 턱이 없었다.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받았다. 제빵 기술에 대한 이 대표의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났기에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후쿠오카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 '네가 내려고 하는 맛을 선명하게 하라'입니다. 맛을 선명하게 내는 건 곧 색깔이 생긴다는 의미이고 그것이 개인 베이커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셰프마다 같은 빵을 만들면 대량 생산하는 프랜차이즈 빵집들과 다를 게 없는 거죠. 빵 하나를 만들더라도 생강도 너보고 명란젓도 섞는 등 어떻게 하면 더 특별하고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대표가 후쿠오카에서 배웠던 두 번째 교훈은 셰프의 중요성이었다. 맘모스제과를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확장시킬 생각이 없는 것도 '사람이 곧 맛'이란 원칙 때문이다.

"빵을 만드는 건 온전히 사람이 하는 일이에요. 적어도 개인 베이커리에선 그렇죠. 똑같은 사람이라도 기분과 몸 상태에 따라 맛이 조금은 달라져요. 셰프의 컨디션에 따라 빵 맛이 달라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죠. 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이렇게 달라지는 데 서로 다른 셰프가 만드는 빵은 완전히 다른 맛을 낼 수밖에 없죠. 레시피가 같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맛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거죠."

◆ 맘모스제과의 40년 경쟁력…"재료, 재료, 재료"

이 대표는 창업주 세대부터 이어져온 맘모스제과의 경쟁력을 재료로 꼽았다. 가업을 물려받을 때에도 아버지가 유일하게 강조하신 건 "신선한 재료를 아낌없이 써라"였다.

"재료는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문젯거리입니다. 조금 덜 신선한 재료를 쓰면 마진이 올라 남는 게 많기 때문에 쉽게 값싼 재료를 쓰려는 유혹에 빠지는 거죠. 가업을 물려받은 후 셰프를 존중하는 뜻에서 아버지가 별다른 얘기는 안 하시지만 유일하게 조언하시는 건 바로 이 재료에 대한 부분이에요."


맘모스제과는 안동에서 제철에 나는 자연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블루베리 파이, 사과 또띠아, 호박 타르트 등은 고객들이 줄 서서 구매할 정도로 인기상품이지만 재료가 떨어지면 더 내놓는 법이 없다. 원래의 맛을 유지할 수 없어서다.

"안동엔 질 좋은 농산물이 많아요. 밤고구마와 마를 이용한 빵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도 재료가 다 떨어지면 더 내놓을 수 없어요. 고구마와 마는 전국 어디서나 구할 순 있지만 안동에서 나는 것과 맛이 같다고 보장할 수 없거든요. 최고 인기 품목 중 하나인 유자파운드도 검증된 재료로만 한정해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 때문이었을까. 맘모스제과는 2년 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맛집 가이드 '미슐랭 그린 가이드'로부터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 23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미슐랭 가이드 측에서 언제 왔다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몰래 와서 맛을 보고 갔나 봐요. 지인들로부터 맘모스제과가 미슐랭 가이드에 나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죠."

◆ 10년 후 빵집은?…"개인 베이커리 시대 올 것"

이 대표는 2세 오너로서의 최대 수혜로 "재료값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을 꼽았다. 일반 파티쉐들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할 때까지 배 이상의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평범한 빵 하나에 견과류를 넣거나 커피 향을 첨가하면 또 다른 빵이 되는 거죠. 지금 맘모스제과에서 팔고 있는 빵 들도 저희 파티쉐들의 고민에서 나온 겁니다. 무언가 다르게 하고자 하는 노력인 거죠."

이 대표는 앞으로 특색 있는 빵집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미 프랑스 일본 등 앞선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에선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지고 개인 베이커리들이 자리 잡은지 오래라는 것.

"국내 프랜차이즈 빵집들은 지금이 정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일본은 1980년대에 주도권이 프랜차이즈에서 개인 파티쉐가 운영하는 베이커리로 넘어왔어요. 프랜차이즈는 편의점에 납품하는 역할 정도고요. 빵에 대한 소비자들의 입맛이 까다롭게 변하고 있어요. 점포마다 같은 맛을 내는 게 미덕인 프랜차이즈는 이 요구를 맞춰줄 수 없어요."

그러기 위해선 동네 빵집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랜차이즈에서 만드는 빵을 똑같이 내놓는다면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대기업 빵집을 쫓아갈 수 없다는 것.

"곰보빵 하나를 만들더라도 달라야 해요. 맛을 더 진하게 낼 건지 간을 더 쎄게할 건지 등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셰프가 풍미를 결정하는 겁니다. 자신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제가 맛의 표준을 안동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요."

글= 한경닷컴 노정동 기자, 사진= 한경닷컴 변성현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