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277

어사 박문수와 관상쟁이

어사 박문수와 관상쟁이 어사 박문수(1691 ~ 1756)가 어명을 받들어 호남으로 암행을 나갔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노량진 포구에 갔는데 사람이 많고 복잡했다. 그 중 유독 점쟁이 하나가 눈에 띄어 복채가 얼마인지 묻자 닷 냥씩이나 했다. 사기꾼이 아닌가 싶어 관찰하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관상을 보러왔는데, 닷 냥이라는 큰 돈을 내고서 점을 보았다. 관상쟁이가 눈을 감고 글자중 하나를 찍어보라 하여, 부인은 한일자(一)를 찍었다. 찍고 나서는 집 나간 지 10년 된 남편의 생사를 알고 싶다고 하니 한일자가 누워있는 상이라 사람이 죽었으니 찾지 말라고 했다. 부인은 닷 냥이 아깝기도 하고 믿기지 않기도 해 다시 한 번 점을 보자고 하여, 이번에는 약(藥)자를 찍었다. “약자는 풀 초(草)변에 가운데 흰..

시링빙야화 2022.04.30

학동과 머슴

사랑방 야화 (20) 학동과 머슴 유월 땡볕에 밭을 매다 점심을 먹고 다시 들로 일하러 가는 길에 서당 앞을 지나게 됐다. 선들바람이 부는 서당마루에서 학동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 두 살 아래 도련님도 보였다. 훈장님의 선창에 합창하듯 학동들이 따라 읊는 소리는 숲 속의 산새들 울음소리보다 낭랑하다. 훅훅 달아오르는 지열 속에 땀방울을 비 오듯 쏟으며 콩밭을 매는 억쇠는 연방 한숨을 토했다. “단 열흘만이라도 저 학동들처럼 신선놀음을 해봤으면 지금 죽어도 원이 없겠네, 아고 아고 내 팔자야.” 저녁을 먹고 제방에 벌러덩 누워 연초를 피워 물고 있는 억쇠에게 도련님이 찾아왔다. “억쇠야, 나도 담배 한번 피워보자.” 억쇠는 눈을 크게 뜨고 “대감 나으리 알면 큰일 나요.” 두어 모금 빨다가 캘록캘록 거린 ..

시링빙야화 2022.04.25

야합(野合)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97)/ 야합(野合)♤ [반듯한 아들 하나 원한 공흘 북촌 무녀집에 찾아가는데…] 성은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노나라 노양공 10년, 진나라가 제후의 군사를 동원해 노나라로 쳐들어와 핍양성을 공격하자 노나라 군사들은 가을바람에 낙엽이 쓸리듯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출입문이 내려앉았다. 노나라 군사들의 퇴로가 막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됐을 때 기골이 장대한 노군 한 사람이 혼자서 문을 들어 올렸다. 노나라 군사들이 물밀듯이 성을 빠져나갔다. 키가 팔척에 어깨가 태산처럼 벌어진 대부 공흘(孔紇)은 노나라의 구국 영웅이 됐다. 그의 무공(武功)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하급 무관 공흘은 백성으로부터 추앙받는 대부였지만 그 자신은..

시링빙야화 2022.04.07

천하 호걸 장비

사랑방이야기(323) 천하 호걸 장비 잠자던 마누라가 대문이 부서질 듯 쾅쾅거리는 소리에 종종걸음으로 눈발이 휘날리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자, 장비가 술 냄새를 풍기며 술집 작부를 옆에 끼고 와 안방 아랫목을 차지했다. 마누라 순덕이는 포대기에 남매를 싸안고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 앞에서 쪼그리고 밤을 새웠다. 장비는 육척이 넘는 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허벅지가 일주문 기둥만 한 천하장사다. 왕년에 단옷날 씨름판에서 끌고 온 황소가 몇 마리였던가. 지금 장비는 토목공사업자다. 저잣거리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현청에서 발주하는 다리도 놓고 길도 닦고 저수지도 축조해 돈을 잘 버는 데다 돈까지 잘 써 천하의 호걸로 통한다. ‘장천석’이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건만 사람들은 그를 장비라 ..

시링빙야화 2022.04.07

대감과 종년

사랑방 야화 ⑵ 대감과 종년 어떤 양반댁에서의 일이다. 늙은 대감이라는 게 주책도 없지, 종년을 시켜 이부자리를 펴러 들여보내면 매번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눈치다. 마나님이 그 거동을 알았으나 며느리· 손주며느리까지 있는 점잖은 터수에 집안 시끄럽게 떠들 수도 없고, 그러고보니 대감은 날로 수척해 가는 것만 같고…. 방 윗목에 놓은 물그릇이 쩡쩡 어는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밤이다. 마나님이 가만히 보니 대감 사랑방에 살짝 들어간 종년이 나오지를 않는다. 마나님은 부엌으로 가 간단하게 약주상을 차리고 식혜와 홍시를 소반에 담아 때맞춰 일부러 잔기침에 신발을 끌며 대감방으로 향했다. 대감이 막 포동포동한 것을 애무하는데 안마당에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옷을 입힐 겨를도 없이 다락을 열고 발가벗은..

시링빙야화 2022.03.20

쾌락 체감의 법칙

# 사랑방이야기(313) 쾌락 체감의 법칙 보부상 박 서방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문중산 응달의 초가삼간에 바글바글 처자식 넣어두고 무릎이 닳도록 걷고 또 걸었다. 보부상들은 고된 하루를 접고 주막에 들어가면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술판에 노름판에 들병이와 해우 판도 벌리건만, 박 서방은 대폿술 딱 한잔 마시고선 객방 구석에서 쪼그리고 잠만 잤다. 그렇게 소태처럼 짜게 모은 돈으로 겨울이면 한 뙈기 두 뙈기 논밭을 사 모았다. 박 서방 마누라도 지독한 또순이로 남의 큰일 집 일손을 도와주고 쉰밥도 가져와 죽을 쒀 먹었다. 회갑이 넘도록 산 넘고 물 건넌 박 서방은 기어코 무릎이 뭉개져 앉은뱅이가 됐지만 그 대신 땅 부자가 됐다. 딸 넷을 시집보내고 아들 하나는 장가가서 농사꾼이 됐다. 아들 박 생원은 지긋지..

시링빙야화 2022.03.17

양자

사랑방이야기(322) 양자 온 세상이 깊은 잠에 빠진 적막강산. 오줌을 누러 다리 밑 움막을 나온 거지 아이의 눈에 개울 얼음장 위 떨어진 보따리 하나가 희미하게 들어왔다. 다리 위를 지나가던 소달구지에서 쌀가마라도 떨어진 걸까, 다가갔더니 이게 무엇이냐! 술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니 취객이 다리에서 떨어진 것이다. 북풍한설은 몰아치는데 금방 떨어진 게 아닌 듯 옹크리고 모로 누워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을 만져보니 돌처럼 차가웠다. 움막으로 달려가 할배를 깨웠다. 할배가 그 취객을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팔다리를 주물렀다. 희끄무레 동녘이 밝아올 때야 취객이 눈을 떴다. “우리 막동이 아니었으면 당신은 얼어 죽었소. 어찌 젊은 사람이 술을 그렇게….” 할배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링빙야화 2022.03.13

음각치

사랑방이야기(324) 음각치 소리꾼 음각치의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들어본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음각치 소리를 ‘소리 아편’이라 말한다. 한번 들어본 사람은 온몸이 파도치는 떨림을 잊을 수가 없어 백리 길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와 음각치 소리를 다시 듣고는 까무러친다. 적벽가를 부를 때면 하늘이 휘감기고 땅이 갈라지며 심청가를 부르면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 호사가들은 음각치가 제 손으로 성대에 결절을 만들어 득음했다고 제 눈으로 본 것처럼 말하고 다닌다. 음각치는 안개에 싸여 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녀 전북 순창에 사는 꼽추 고수(鼓手)와 가끔씩 연락이 될 뿐이다. 음각치가 어둠살이 내리는 지리산 자락 전남 구례에 와 섬진강 나루터 주막에 들어가려다가 걸음을 ..

시링빙야화 2022.03.13

하늘의 뜻

사랑방이야기(360) 하늘의 뜻 모숙이는 시집간 지 반년도 안돼 청상과부가 되었다. 신랑이 급사하고 나서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자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모숙이는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이 무슨 팔자가 새로 시집도 못 가게 뱃속에 씨를 뿌려 놓았나! 애를 떼려고 온갖 독한 약을 지어 먹고, 비 오는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가서 뒹굴어도 보고, 바위에서 떨어져도 봤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마음을 바꿔 먹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몇 달 후 옥동자를 낳았다. 탁발 온 스님이 이름을 ‘주용정’이라 지어주며 범상한 관상이 아니라고 귀띔했다. 모숙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미안하다 내 새끼야” 하고 잉태 중에 지우려 했던 죄과를 후회하며 꼭 껴안았다. 주용정은 무럭무럭 잘 컸다. 어미와 아들, ..

시링빙야화 2022.03.05

안개속으로 사라지다

조주청의 사랑방야화 (351) 안개속으로 사라지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합강나루 주막에 어둠살이 내리면 저녁상을 물린 장돌뱅이들은 곰방대를 두드리고 연신 들창을 열어보며 심란해진다. 빗줄기로 봐선 밤새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내일이 장날인데. 이경이 되자 여기저기 어울렸던 술판도 시들해지고 뒤꼍 구석에 처박힌 객방이 아연 반짝이는 눈빛들로 술렁거린다. “자∼ 내일 장은 종쳤고 운발이나 대 보자구.” 항상 시동을 거는 건 소장수 곽대룡이다. 벽을 등지고 쪼그려 앉은 개평꾼 노 서방이 슬며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더니 도롱이를 쓰고 주막 삽짝을 나서 빗속을 걸어가 막 문을 닫으려는 장터가의 묵집으로 들어갔다. 묵집 과부와 개평꾼은 초면이 아니다. 노름판이 무르익어 삼경이 되면 노름꾼들은 밤참으로 묵을 시..

시링빙야화 2022.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