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277

친구

사랑방이야기(359) 친구 민지와 수월이는 이웃에 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지만 집안은 딴판이다. 민지네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수월이네는 천석꾼 부자다. 어릴 적 소꿉장난을 하며 둘이 손잡고 장날 구경 다닐 때만 해도 서로 간이라도 빼줄 듯이 친했지만 혼기가 차면서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했다. 민지는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가난에서 벗어나려 했고, 수월이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할 사위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신랑감을 찾았다. 강 건넛마을 백 진사의 아들 서범이는 작년에 초시에 합격하고 내년엔 대과에 응시할 계획이다. 수월이네 집과 강 건너 백 진사네 집을 매파가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날락거리더니 혼담이 무르익어 꽃 피고 새 우는 내년 춘삼월에 혼례를 올리기로 하고 약혼을 했다. 민지네는 아버지가 시름시름 오년을 앓다가..

시링빙야화 2022.03.03

오돌이

사랑방이야기(332) 오돌이 함경북도 청진 바닷가 주막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오월이는 박박 얽은 곰보다. 안방에서 주모와 함께 자는데 주모가 샛서방을 물어들이는 날은 빈방으로 쫓겨나든가 마루에서 자야 한다. 하루 일을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녹초가 되어 빈 객방에서 자는데 취객이 들어와 집적거 리는 게 귀찮아서 발로 밀치고 잤더니 이럴 수가! 서너달이 지나니 헛구역질이 나는 것이다. 달이 차자 아들을 낳았다. 주막에 들락날락거리는 땡추 노스님이 ‘오돌(吳乭)’이라 이름 지었다. 오돌이는 고샅의 개똥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구르며 한살 두살 먹더니 여섯살이 되자 엿장수가 되었다. 청진 바닷가에서 열살 아래 오돌이하고 맞짱 떠 코피 터지지 않은 아이가 없었다. 열대여섯 살 나는 저잣거리 왈패도 오돌이 깨엿을 먹..

시링빙야화 2022.02.14

불면증

사랑방이야기(275) 불면증 최 부자는 몇 년째 악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도 오지 않을 뿐더러 비몽사몽간에 헛것이 보이고 환청에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 천석꾼 최 부자가 무슨 약을 안 먹어봤겠는가. 조선 팔도강산 용하다는 의원 다 찾아가 백약을 처방받아 정성껏 달여 먹어도 모두 허사였다. 그날도 잠이 안 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까만 밤하늘에 초승달이 칼처럼 꽂혀 있었다. 뒷짐을 지고 대문을 나서자 하인들이 따라 나오는 걸 돌려보내고 혼자서 걸었다. 끼룩끼룩 기러기들이 밤하늘을 날아가고 대나무숲은 바람에 서걱거렸다. 논두렁길을 걷다가 둑길을 걷다가 산자락길을 걸었다. 웃음소리가 났다. “내가 웃어본 지 언제였던가.” 최 부자가 웃음소리를 따라갔다. 산허리 외딴 초가집 불빛에 노랗게 물..

시링빙야화 2022.02.06

무송

랑방이야기(224~5) 무송 무과에 급제한 지 3년이 지났건만 도대체 발령장을 받을 수 없어 목을 빼고 기다리던 박무송은 단봇짐 하나 꾸려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병조판서 집 대문 밖에는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이 한숨을 토하며 줄을 서 있었다. 한나절을 기다려 어둠살이 내릴 때 무송이 만난 사람은 병조판서가 아닌 이 집 집사인 판서의 손위 처남이었다. 행랑방에서 무송과 마주 앉은 구렁이 같은 집사의 입에서 구역질 나는 개소리가 나왔다. “야, 이 답답한 사람아. 팔짱만 낀 채 십 년, 백 년을 기다려봐라. 발령장이 나오나!” 빙빙 둘러댔으나 결론은 삼만 냥을 갖고 오라는 얘기다. 무송이 고개를 숙인 채 끓어오르는 분을 짓눌렀지만 허사였다. “임금은 궁궐에 피를 뿌리고 주색잡기에 빠진 간신들은 매관매직에만 매..

시링빙야화 2022.02.06

공주의 남편

사랑방이야기(298) 공주의 남편 왕이 가장 총애하던 왕비가 출산하다가 죽고 아기는 살았다. 왕은 사랑하던 왕비의 죽음만으로도 애통한데 어미 없는 공주를 보노라면 가슴이 미어져 수라상의 수저도 들지 않은 채 술만 마셨다. 유모는 어린 공주를 안고 항상 왕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라면서 죽은 제 어미를 빼다 박은 공주를 왕은 더더욱 감싸 안았다. 세월이 흘러 공주 나이 열여섯이 됐다. 왕의 명을 받은 도승지가 신랑감을 찾아 사람을 풀었다. 궁궐을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은 왕과 사돈을 맺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일품·정이품 벼슬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데 왕과 사돈이 된다면 권력이 너무 커져 국법으로 막았다. 도승지가 팔도강산에서 올라온 신랑감 목록을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 경상도 관찰사의 둘째아들이..

시링빙야화 2022.02.06

오유지족

사랑방이야기(343) 오유지족 황포돛배가 나루터에 닿았다. 지게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옥색 두루마기에 챙 넓은 갓을 쓰고 강바람에 수염을 휘날리며 한발을 뱃전에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화주, 주 대인이 덩치 큰 지게꾼을 불러올렸다. “이 고리짝을 지고 오현을 넘을 수 있겠나?” “걱정 마십시오, 나으리. 여기서 소인보다 힘센 사람은 없습니다요.” 지게꾼 오 생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고리짝을 들어보던 오 생원이 깜짝 놀랐다. 광목 보자기에 싸인 고리짝이 보기보다 무거웠다. “나으리, 납덩어리가 들었습니까. 왜 이리 무거워요?” 낑낑거리며 배에서 내려 나루터 바닥에 고리짝을 놓고 큰 숨을 토했다. 고리짝을 지게에 올릴 땐 다른 지게꾼의 힘을 빌려야 했다. ‘꺼∼억 꺼∼억’ 까마귀 떼가 안 그래도..

시링빙야화 2022.02.06

허벅지에 점 하나

사랑방이야기(310) 허벅지에 점 하나 “아저씨, 뭣 땜시로 내게 가죽신을 사주고 요렇게 요릿집에 데려와서 너비아니까지 사주는 거예요?” “너가 예뻐서 그러제, 임마.” 성배는 빙긋이 웃으며 여섯 살 세돌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식혜를 먹다 말고 성배가 지나가는 소리로 “누나하고 목간한 게 언제냐?” 이상한 걸 물어봐 세돌이가 “보름 전쯤 됐구먼요”라고 대답하자 성배가 “누나 몸에 말하자면 에∼ 뭐 이상한 거 있어?” 한다. “있긴 있는데, 그건 왜 물어봐요?” “어∼그래. 심심해서 그냥 물어본 거야. 됐어, 됐어.” 이튿날도 성배는 서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돌이를 데리고 저잣거리로 가 깨엿도 사주고 가죽가방도 사주더니만 호빵집에 데리고 가 “누나 몸에 이상한 게 뭐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시링빙야화 2022.02.06

돈자랑, 신랑자랑

사랑방이야기(308) 돈자랑, 신랑자랑 앞집 와 뒷집, 이는 동갑내기로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둘도 없는 친구다. 그러나 둘은 커가면서 모습도 행동거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화는 잽쌌고, 순덕이는 굼떴다. 미화는 말도 잘하고 생글생글 웃는 상이지만, 순덕이는 입이 무거운데다 표정도 무덤덤했다. 미화는 잘 토라졌지만, 순덕이는 화내는 법이 없었다. 열서너살이 되자, 미화는 키도 훌쩍 자라 제 고모 박가분도 훔쳐 바르고, 치마끈도 바짝 조여, 허리는 잘룩하고, 엉덩이는 골짜기를 드러내 걸음걸이도 '살랑, 살랑' 거렸다. 반면에 순덕이는 펑퍼짐한 몸매에 모양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집안은 하나같이 '빈농'이다. 순덕이는 집안일에 팔을 걷어붙여 오뉴월 땡볕에 콩밭을 매고, 보리타작을 할 땐, 손수 도리깨질도..

시링빙야화 2022.02.06

협박

사랑방이야기(279) 협박 막실댁은 이날 이때껏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반듯한 과부다. 시집온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신랑이 급사해 청상과부가 됐지만, 한눈파는 법 없이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셔 고을 사또로부터 열녀상과 효부상을 받아 가문을 빛냈다. 시부모도 이승을 하직해, 이제 홀몸으로 시댁의 큰 기와집과 백여 마지기 문전옥답,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지켜가고 있다. 서른세살 막실댁에게 매파가 여기저기서 혼처를 물고 오지만 막실댁은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유씨 집성촌이다 보니 앞집 뒷집 모두가 일가친척들이라 막실댁은 언행을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다. 유씨 집성촌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타성들 중 덕순네는 자매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다. 덕순네는 친정이 막실댁 친정 이웃동네인 데다, 죽은 막실댁 신랑 ..

시링빙야화 2022.02.06

갖바치

사랑방이야기(320) 갖바치 영월장이 파장할 적에 동강 나루터에 늘어선 황포돛배들도 고래고래 외치던 호객을 멈추고 닻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열서너 살 먹은 소년이 어머니 손을 잡아당기고 한손은 흔들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막 떠나가는 배에 어머니를 먼저 태우고 뛰어오른 소년이 배 난간을 잡고 울상이 돼 발을 동동 굴렀다. 배는 바람을 안고 강을 오르는데 신발 한 짝은 벗겨져 둥둥 거꾸로 떠내려가는 것이다. 바로 그때 나루터에서 짚신장수 소년이 옷을 입은 채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신발 한 짝을 건져내 배를 따라 달려갔지만 역부족. 배는 더 멀어져갔다. 짚신장수 소년이 배를 향해 신발을 던졌지만 뱃전에 못 미쳐 다시 강에 떨어졌다. 배 난간에 매달려 탄식을 하던 어머니와 아들. 그때 아들이 갑자기 신고..

시링빙야화 202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