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277

외팔이

사랑방이야기(329) 외팔이 오종각은 어릴 적부터 영악스럽고 재발랐다. 서당을 마치고 책 보따리를 허리에 맨 채 친구들을 데리고 장터에 가서 야바위판에 끼어들어 공기 돌리기 하는 야바위꾼의 손놀림을 뚫어지게 보다가 허리춤에서 엽전을 꺼내 판돈을 걸어 결국에는 돈을 땄다. 연거푸 돈을 따자 바람잡이가 종각이를 불러내 엽전 몇닢을 찔러주고 보냈다. 야바위꾼의 돈을 따 친구들과 주전부리를 하며 낄낄거리더니 커서도 제 버릇 못 고치고 장터거리 노름판에 들락날락했다. 농사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삼대 부자 없다더니 종각이네도 고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는데 농사짓던 조부가 생뚱맞게 장사를 한다고 덤벼들다가 재산 반쯤 날리고, 종각이 아버지는 주색에 빠져 남은 재산을 축내더니 삼 대째 종각이는 노름에 빠져 두 손에..

시링빙야화 2022.02.06

쩐의 흐름

사랑방이야기(344) 쩐의 흐름 연평도에 조기 파시(波市)가 열릴 때면 구월봉 아래 구월포는 발 디딜 틈이 없고 어깨가 부딪쳐 걸을 수도 없다. 팔도강산 조기잡이 어선 1000여척이 모여들어 연평도·백령도·어청도 근해에서 안강망으로 잡아 올린 오동통 살이 오른 조기에 소금을 뿌려 배에 싣고 황포 돛대를 활짝 펴고 남쪽으로 내려가 영광에 쏟아낸다. 소금을 뿌려 꾸덕꾸덕 해풍에 말리면 굴비가 되는 것이다. 조기와 굴비는 어느 지방에서도 가장 맛있고 가장 비싼 해산물이다. 선주는 잡아온 조기를 어판장에 위탁해 경매에 붙인다. 출어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돈을 선주와 어부들이 반반으로 나눈다. 선주의 전대가 무거운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어부들 전대도 가볍지 않다. 돈이 넘쳐난다. 돈이 들끓는 곳엔 주색잡기가 빠..

시링빙야화 2022.02.06

아버지

사랑방이야기(335) 아버지 어느 겨울, 성균관에 노스님 한분이 찾아왔다. 찾는 사람은 젊은 유생 이주갑이다. “스님께서 어쩐 일로 이 먼 길을?” 주갑이 스님의 두 손을 잡고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노스님을 쳐다봤다. 노스님이 주갑의 손에 이끌려 차방으로 들어가자“놀라지 말게나. 자네 아버지가 보름 전에 돌아가셨네. 아직 장사도 치르지 못했어”하고 말했다. 주갑이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주갑이 퇴청해 종로 뒷골목 조용한 술집에서 스님과 마주앉았다. “나 혼자 조용히 장사를 치러버리려 하다가 자네 모친과 상의한 후 이렇게 찾아왔네.” 막걸리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스님이 얘기를 이어갔다. “이십일 년 전, 어느 초여름 아침에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나갔더니 삽짝 밖에 포대기에 싸인 아기 둘이 울고 있지 ..

시링빙야화 2022.01.25

쌀자루

사랑방이야기(306) 쌀자루 칠전팔기를 믿었는데 류 초시는 과거에 또 낙방했다. 부인 절곡댁은 우물가에서 세수하며 눈물을 감췄다.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데 시아버지 제삿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들 욱이가 고개 너머 저잣거리 포목점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여자에게 기어드는 목소리로 “오늘은 바느질거리 없어요?”라고 묻자 “요즘은 잔칫집이 없구나” 하는 주인 여자의 말에 꾸벅 절을 하고선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양식 독이 바닥난 날, 절곡댁은 아기를 업고 욱이 손을 잡고 삼십리 길을 왔건만, 친정집 사립문 앞에서 한숨을 몇 번이나 쉬고서야 마당에 들어섰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나 친정이지, 올케가 곳간 열쇠를 차고 있는 오라버니 집은 그냥 먼 친척 집이나 다..

시링빙야화 2022.01.25

황간 댁 사연

사랑방이야기(305) 황간 댁 사연 천석꾼 부자 최 참봉이 상처를 하고, 3년 동안을 홀아비로 지내다가 삼십대 초반의 여인에게 새장가를 들었다.최 부자네 안방을 차지한 황간 댁은 사슴 눈, 오똑한 코, 백옥 같은 피부에 앵두입술로 자색이 뛰어났다. 어디 그뿐인가 둥그런 턱 선과 넉넉한 인중, 넓은 이마, 누가 봐도 부귀영화를 타고난 여인이다.고을이 떠들썩하게 혼례를 올린 첫날밤에 변고가 났다. 참봉이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헛간의 담 모퉁이 하나 고치는 일도 구곡암자 영검도사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던 참봉이 아닌가? 그러나 혼인만은 그 여인에게 홀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한 것이다.혼례식을 올리기 전에 여인의 관상을 본 영검도사가 참봉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 여자 배 위..

시링빙야화 2022.01.25

비구니 혜원과 거지 막동이의 가족 만들기

사랑방이야기(297) 비구니 혜원과 거지 막동이의 가족 만들기 조그만 비구니 사찰 에도 초파일에는 사람들이 제법 찾아왔다. 다섯 비구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막내인 열다섯살 사미니 혜원은 종종걸음으로 해우소에 다녀오다가 거지 아이에게 시선이 꽂혔다. 절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일주문 기둥에 등을 기대고 산을 향해 쪼그려 앉아 있는 거지는 혜원을 보자 고개를 돌렸다. 산들바람에 깜박 잠이 들었다가 얼마 만에 깨어났나, 거지 아이 앞에 삼베 보자기가 펼쳐져 있고, 떡과 약밥·유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주문에 몸을 숨기고 정신없이 먹었다. 초파일이 지나고 한장 터울이 지난 어느 날 밤, 비구니 혜원이 초롱을 들고 해우소를 가는데 모깃소리만 하게 “스니임” 하고 누가 불러 깜짝 놀라 돌아봤더니 그..

시링빙야화 2022.01.25

왕과 심마니

사랑방이야기(338) 왕과 심마니 왕이 손수 전쟁터에 나갔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적군과 교전도 없이 대치한 지 벌써 삼 개월째다. 소 세 마리, 돼지 열 마리에 술독이 바리바리 실려 왔다. 삼경이 넘어서야 술 취한 왕이 처소로 들어갔다. 계곡 건너 있는 적진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새벽닭이 울적에 불화살 하나가 창공을 가르자 ‘와∼’ 적군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왕을 지켜라∼.” 병마절도사의 외침도 허공 속에 흩어졌다. 초병들도, 호위무사들도 지리멸렬 도망가기 바빴다. “왕을 잡아라.” 혼자서 왕의 처소를 지키던 병마절도사도 적군 척후병의 칼날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속옷만 걸친 왕은 넘어지고 자빠지며 숲속을 기었다. 가시나무에 찔리고 바위에서 뒹굴고 나무에 부딪혀 온몸은 흙투성이, 피..

시링빙야화 2022.01.23

그때 그날 밤

사랑방이야기(314) 그때 그날 밤 조선 숙종때 '이운봉'이란 사람이살았다. 열여덟 살 白面書生 '이운봉'은 단봇짐 하나 달랑 메고 문경(聞慶)새재를 넘고 탄금대(彈琴臺)를 지나 주막(酒幕)집에서 겨우 새우잠을 자며, 걸어걸어 '한양'에 다다라 '당주동' 구석진 여관에 문간방 하나를 잡았다. 과거가 한 달이나 남았지만 '한양' 공기도 쐬고 과거(科擧) 흐름도 잡을 겸 일찍 올라온 것이다. 허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 달 동안 먹고 잘 일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다. 자신이 '행랑(行廊)아범 노릇을 하겠다'며, 좁은 문간방 값을 깎고 또 깎아 다른 방의 반값에 눌어붙었다. 밤늦게 외출했던 손님이 돌아올 때면 얼른 나가 대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 마당도 쓸었다. 밥때가 되면 여관..

시링빙야화 2022.01.23

박 대인의 귀향

사랑방이야기(309) 박 대인의 귀향 만복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서당에 다니던 그는 지필묵 공방에 직접 찾아가 능숙한 흥정으로 종이와 붓과 먹을 싸게 사서 쏠쏠한 이윤을 남기고 서당 친구들에게 팔고 훈장님에게도 이문을 붙여 팔았다. 불알친구인 소백은 만복과 붙어 다니는 아삼륙이지만 성격은 딴판이다. 한마디로 만복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고 소백은 새가슴이다. 둘 다 서당엔 다녔지만, 과거를 볼 만한 재목들은 아니고 까막눈이나 면하자는 생각이다. 가까운 이웃인 두 집안은 부자는 아니지만 보릿고개를 별 어려움 없이 넘기는 중농 집안이다. 둘 다 차남이라 만복이도 소백이도 장가가서 고만고만한 논밭을 받아 세간을 났는데 바로 앞뒷집이다. 만복은 아들 하나를 낳더니만 어느 날 주막에서 소백을 붙잡고 하소연을 늘..

시링빙야화 2022.01.23

가슴에 박힌 못

사랑방이야기(307) 가슴에 박힌 못 최 대인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모으며 남의 가슴에 박은수많은 못을 모두 뽑아놓으면 한 자루는 될 것이고, 장리쌀을 놓아 남의 집안을 풍비박산 낸 게 몇 집이던가. 그렇게 천석꾼 부자가 된 최 대인은 모든 걸 얻었지만 소중한 걸 잃었다. 딸 셋 뒤에 애타게 바라던 아들을 얻었건만 금이야 옥이야 하던 삼대독자를 홍역으로 잃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된 것인지 씨를 뿌렸다 하면 딸이다. 첩을 들이고 기생머리를 얹어줘도 딸, 딸, 딸…. 딸이 아홉이나 됐다. 대가 끊어지게 생겼다. 용하다는 의원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날린 헛돈이 얼마이던가. 허구한 날 방구들이 꺼져라 한숨만 쉬던 최 대인이 어느 날 삿갓을깊이 눌러쓰고 탁발 온 노스님을 사랑방으로 불러들였다. 곡..

시링빙야화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