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봉서루를 다녀와서
정자문화생활관을 출발한 우리는 20여년전
솔향이 그윽한 돼지고기숯불구이를 먹기 위하여
자주 찾았던 봉성이 생각나서 점심을 그 곳에서 먹기로 하였다.
한 시가 넘은 시간에 '청봉숯불구이'식당에 들렸더니
손님들도 많았고 솔잎을 깔아놓은 접시위에 담겨진 숯불구이는
역시 색다른 맛을 느낄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식당옆에 있는
봉서루와 철재로된 영세불망비와 돌거북을 구경하였다.
봉성면은 봉화고을의 소재지로
삼국시대 고구려의 고사마현(古斯馬縣), 신라 경덕왕때 옥마현(玉馬縣),
고려 현종때 봉성현(鳳城顯), 공양왕때 봉화현(奉化縣)으로
조선 고종때 봉화군으로 명칭이 바뀌어 왔고
봉성면사무소 뒷편에는 금륜봉과 갈마봉이 있다고 한다.
봉서루(鳳棲樓)는 봉화현 관아의 동헌문루의 일부였던 건물로
봉성면사무소에 있었던 것을 구한말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1738년(인조 10) 봉화현감 이광직李匡直)이 중건하였으며
현리의 유현들이 집회하여 교우하였던 장소였다고 한다.
봉서루 옆에는 '縣監 趙公秉謚永世不忘碑'라 세겨진
철비가 비각안에 있었고 그 옆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금륜봉(金輪峰)은 배산면양(背山面陽)의 '봉황이 날아든다'는
비봉귀소형국(飛鳳歸巢形局)의 명당으로 성곽안에 오동나무가
밀림을 이루어 봉황새가 서식하는 고개라 하여 봉성(鳳城)이라 학였고
갈마봉(渴馬峰)은 '목마른 말이 물 먹으러 가는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
멍당이라 혈(穴)앞에는 연못이 있어야 하고 목마른 말이 아무 생각없이
물로 달려드니 생기 발랄한 용맥이 저수지를 만나 지기(地氣)를 응집하여
산 기운이 발복을 가져 온다는 것.
따라서 옛날 봉성소재지에는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연못이 열두곳이나
있었다고 전하며 연못이 있어 고을사람들이 건강하고 복을 받으며 살아왔고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거북바위를 연못가에 모셔 화가(火氣)를 눌렀다 전하고
2005년 8월초 봉성장터정비사업중 출토된 돌거북을
2005년 8월 13일 제9회 봉성돼지숯불요리축제 개막시
봉서루 옆에 안치하고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고 한다.
장터구경을 마치고 봉화향교를 들렸으나 향교는 잠겨져 볼수 없었고
향교앞에 세워진 선정비군을 볼수 있었다.
봉화향교(奉化鄕校)는 세종때 세워져 1579년(선조 12) 현감 조목이 중건하고
1925년 군수 서병린이 중수 하였으며 1950년 향교안에 봉성고등공민학교를
설치하였다가 1975년 폐교하였으며 전학후묘의 배치로 유교문, 누각,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고 성현 27위를 모시고 있다고 하며
갑오개혁이후 강학기능은 없어지고 공자탄신일인 음력 8월 27일에
제사만 지낸다고 한다.
현감선정비군은 조선 500년동안 봉화현에 파견된 193명의 현감중에
백성을 사랑하고 구휼(救恤)하며 문맹(文盲)을 퇴치하는 등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분들에게 현민들이 뜻을 모아 선정비(善政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구휼에 힘쓴 아전(衙前)의 창덕비(彰德碑)와 열려비(烈女碑)를 세워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하였는나 세월이 흘러 풍화(風化)되고 퇴락(頹落)한 것이 안타까워
1972년 산재되었던 비들을 작곡(作哭)에 모았다가
2012년 여기로 옮겨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봉성에서 맛 있는 점심을 먹고 봉성의 역사적인 사실들과
봉서루, 영세불망비와 거북바위, 봉화향교와 현감선정바군들을
돌아보면서 봉성에 대하여 새로운 상식을 넓히는 시간을 가졌으며
15:00에 도촌리 만대헌에서 열리는 누대정강좌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후면 도촌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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