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38

첫날밤 소박맞은 세 자매(중)

김삿갓 56 - [첫날밤 소박맞은 세 자매(중)] ​"그러면 어쩌다가 세 자매분이 각각 첫날밤에 소박을 맞으셨는지 말씀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김삿갓은 주인 노파 자매들이 첫날밤에 어떤 이유로 소박을 맞게 된 것인지 궁금하였다. ​노파는 옛일을 회상하는 듯이 잠시 망설이더니...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70여년 전, 주인 노파의 아버지는 강원도 원주에서 한양으로 상경하여 젊은시절 학문을 이룬 뒤 한양 남산골에 터를 잡고 지내는 대쪽 같은 청년 선비였다. 그는 십 칠세에 과거를 보아 한 번에 초시에 급제할 만큼 수재형의 샌님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초시 시험에 급제한 그해 가을 불현듯 고향에서 비보가 당도 하였으니 그의 아버님께서 고향인 원주에서 돌아 가..

첫날밤 소박맞은 세 자매(상)

김삿갓 55 - [첫날밤 소박맞은 세 자매(상)] ​김삿갓은 사나이가 가르킨 고개를 넘어 앞을 살펴보니 과연 집이 한 채 있었다. 산골에서는 보기드문 반기와집 이었는데 기왓골에는 드문드문 잡초가 돋아났고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은 판자가 썩을대로 썩어 제각각 바람에 너덜거렸다. (초시 댁이라더니 초시 양반이 죽고나서 집 안팎을 수리할 사람이 없는게로구나) 김삿갓은 그 집이 초시 댁이 틀림없어 보였기에 대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그러자 칠십 노파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누구냐고 묻는다. ​"저는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재워 주실 수 있겠는지요?" ​노파는 대청마루로 나오더니 딱한 얼굴을 하며 말한다. ​"우리 집은 나혼자 사는 집이라오. 사정이 딱해 보이니 들어 ..

아들에 이어 마누라를 잃은 사내를 위로하며

김삿갓 54 - [人生無想:아들에 이어 마누라를 잃은 사내를 위로하며] ​오진사 집을 떠나 온 김삿갓은 원주(原州)를 향해 걸어갔다. ​때는 가을이 짙어져 산길 사이에 산들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졌고 하늘가에는 어느새 기러기가 "끼룩"대며 떼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아침부터 스산한 기분이 들던 차에 갑자기 당나라 시인 유우석의 시가 머리에 떠 올랐다. 하처추풍지 何處秋風至(가을 바람은 어디서부터 불어 오는가) ​소소송안군 蕭蕭送雁群 (솔솔 불어 기러기 떼를 보내네) 조래입정수 朝來入庭樹 (아침부터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 고객최선문 孤客崔先聞 (외로운 나그네가 먼저 듣노니.)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사십쯤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새로 만든 듯한 무덤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게 보였다. 인정 많은 김..

내불왕 내불왕의 감춰진 속 뜻

김삿갓 53 - [내불왕 내불왕(來不往 來不往) 의 감춰진 속 뜻] 제천과 원주 사이의 산길을 진종일 걸은 김삿갓, 힘도 들고 허기도 지는데, 석양 노을 조차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정처없는 나그네의 심사가 가장 고된 시간은 지금처럼 저녁 노을이 짙게 깔리는 시간이다. 유람을 떠난 바가 아니라면 수중에 돈이 넉넉히 있을리 없고, 그러다 보니 먹고 잘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삿갓이 이런 마음 급한 해걸음에 어떤 마을에 당도하니, 마을 한복판 고래등 같은 기와집 마당에는 큰 잔치를 벌이는지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며 한편에서는 떡을 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전을 부치는 등,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삿갓은 전을 부치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더욱 허기가 느껴져, 아무나 붙잡고 물어 ..

오대천지 주인거사

김삿갓 52 - [오대천지 주인거사五大天地 主人居士] ​다음날 아침, 김삿갓이 조반을 얻어먹고 나니 주인장이 구해 놓은 널판지를 가리키며 "이만 하면 되겠소이까?"하며 물었다. ​"좋습니다. 아주 훌륭한 현판 감입니다." ​그리고 김삿갓은 즉석에서 붓을 들어 "五大天地 主人居士" 라는 글자를 휘갈겨 썼다. ​"이게 무슨 뜻이오?" "주인장은 모르셔도 됩니다. ​ 내가 주인장을 대신하여 스무냥 대신 사또에게 이 현판을 직접 헌납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김삿갓은 십 리가 넘는 읍내까지 현판을 몸소 메고 동헌으로 찾아가 원님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대가 누군데 사또 어른을 뵙자고 하는가?" 이방이 묻자 김삿갓이 대답했다. ​"사또 어른께서 이번에 영전을 가신다기에, 시생이 영전을 축하하는 뜻에서 현판 ..

다시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

김삿갓 51 - [다시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 "五大天地 主人居士"] ​집을 나선 김삿갓은 길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마누라의 눈에 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집에서 제법 멀찍히 떨어지자 비로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자고로 남자에게 무서운 것이 세가지 있으니 그 첫째는 외진 산길에서 호랑이와 마주치는 것이요, 그 둘째는 빚장이와 맞닦뜨렸을 때가 아니겠는가?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는 생각도 없는데 늦은 밤 마누라가 밑물을 하고 평소와 다르게 정겹게 웃으며 가까이 올 때가 아니겠나?) ​마누라로부터 멀리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김삿갓은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쯤이면 아내가 자신이 집을 떠나오며 남겨둔 서찰을 보았을 것이고 크게 낙담하고 있을 것..

고향에서

김삿갓 50 - [고향에서] 이튼날 이른 아침 삿갓, 아니..병연은 아우 병호의 안내로 뒷산에 올라 형의 무덤에 성묘를 하고 모처럼 고향의 마을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병호야, 네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형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니?" ​아우 병호도 장가를 가고 분가를 한 뒤지만 집에 와 들으니 농삿일은 그 아우가 모두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형님이 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형님은 형님대로 생각이 있으시니 제가 어찌 형님 뜻을 좌우하겠습니까?" ​"글쎄 말이다. 뜻이라는 것이 별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방랑 생활을 하니까 세상의 번뇌는 잊을 수 있더구나." ​"형님, 그래도 아주머니나 어머니가 불쌍해 지니 집에 계셔야죠." ​"허긴.. 그래서 우선 ..

고향(故鄕) 앞으로

김삿갓 49 - [故鄕 앞으로] 이튿날부터 김삿갓은 모든 것을 다 잊고 고향에나 갈 결심을 굳게 하였다. 옛날 걸어온 그 길을 부지런히 걸어 보름만에 강원도 땅을 밟았다. 가을도 깊어 이제는 조석으로 찬서리가 내려 겨울을 재촉하는 무렵이었다. ​늦은 가을 고향 산천은 이미 낙엽이 지고 오곡을 거두어들인 전답은 황량하기만 했다. ​삿갓은 며칠을 더 걸어 '영월땅 고향마을' 에 당도했다. 벌써 해는 지고 황혼이 깔린 뒤라 아무도 자기를 알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삿갓은 금의환향도 아닌데 차라리 해가 져서 어두운 것에 마음이 편했다. 삿갓은 초라한 초가집 사립문을 가만히 밀고 들어섰다. 집은 사년 전 떠날 때 보다 더 낡고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 마음은 크게 불러야 하겠다고 시켰지만 정작 어머니를 부..

다시 찾은,아는 이 없는 쓸쓸한 안변거리

김삿갓 48 - [다시 찾은,아는 이 없는 쓸쓸한 안변거리] 김삿갓은 행복했다. 곱단이와의 신혼생활은 지난해 가련이와 보낸 시간보다 더 자유롭고 즐거웠다. 노처녀를 여의지 못할 줄 알았던 곱단 어머니는 가히 사위가 자랑스러웠고, 천하의 시객을 남편으로 맞은 곱단이는 김삿갓을 온갖 정성으로 섬기고 사랑했다. 그런 시간은 일년이 넘었고 뜰앞에 오동나무는 다시 가을 소리를 내고 있었다. 未覺池塘 春草夢 / 階前梧葉 巳秋聲 미각지당 춘초몽 계전오엽 사추성 연못가에 피어난 봄풀은 꿈도 깨지 못했는데 뜰앞에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사람이 사는 인생의 부귀영화가 다 무어란 말인가. 오늘,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오동잎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아니한가 ? "내가 또다시 이렇게 안일한 생활만 해서는 아니 ..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

김삿갓 47 -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 시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란다] 다음날 , 최백호는 자기 부인을 시켜 곱단이네 집으로 미리 통지를 보내고 삿갓에게는 새옷을 한벌 갈아 입힌후 그를 데리고 재넘어 곱단이 집을 찾아갔다. 곱단의 집은 재넘어 남향에 자리잡은 조그만 기와집으로 마당 앞에는 한참 장미가 꽃을 피우고 있었고 손님이 온다는 기별이 있어서 그런지 집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이리오너라 ! " 안마당을 지나 대청앞에 가서 최백호가 크게 부르니 부엌에서 한참 음식준비를 하던 곱단 어미가 앞치마 바람으로 뛰어나와 "어머나 ! 백호어른 이렇게 와주셔서 ... "하며 부산하게 두 사람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사랑에 나란히 앉은 두 선비는 무언중에 희색이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