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38

관북천리 (關北千里)

김삿갓 25 - [관북천리 (關北千里)] 다음날 , 김삿갓은 사랑방에서 느즈막히 일어났다. 밖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 것 같은데 여인이 뭐라고 분부를 내리는 것으로 보아, 식구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주모도 돌아왔고 머슴도 돌아왔다. 안방 여인은 사랑에 묵고 계시는 선비가 천하의 명문장가로 청원서를 써주셨으니 아침이 끝나는 대로 관아에 가지고 가야한다고 설쳐댔다. 여자란 낮과 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더니 그말이 옳다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지난밤에 있었던 두 사람의 황홀한 순간을 생각한 것이다. 잠시후 아침상이 들어왔다. 역시 상다리가 휘어졌다. "저는 마당쇠를 데리고 관아에 들어가 어제 써주신 글을 직접 사또께 드리고 오겠습니다. 떠나지 마시고 사또가 어떻게 일을 처..

월백설백 천하지백

김삿갓 24 - [월백설백 천하지백(月白雪白 天下地白)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고 세상천지 모두 하얗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사랑방은 조금 전까지 누군가 사용하던 것처럼 매우 정갈했다. 기름을 잔뜩 먹음은 장판은 거울처럼 번들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을 데워 놓을테니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어안이 벙벙했다. 외간남자가 안채로 들어온 것도 과분한데, 목욕물을 데워 준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 허나, 이순간 모든 것의 결정권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여인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혼자 따뜻한 방에 앉아있으려니 졸음이 사르르 찾아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마주대했던 미모의 여인의 환영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면서 ..

양쪽 집에다 같은 묘자리를 팔아

김삿갓 23- 양쪽 집에다 같은 묘자리를 팔아 "아니 무슨일이 있었소이까 ? " "남편 묘 옆에, 그러니까 봉분 오른쪽 우청룡(右靑龍) 쪽으로 웬 묘가 하나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 "그래서 하도 기가막혀 알아보니까 새로생긴 이 묘는 건너마을 안 진사 아버지 묘였던 것이예요. 해서 급히 가서 따졌지요."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 "그집 말이, 지관에게 후히 돈을 주고 자기네 부친 묘자리 하나를 부탁하였더니 그곳에 모시라 하기에 묘를 썻노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 이장을 하라 하였더니 오히려 비용을 물을 것이니 우리보고 이장을 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무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관가에 송사를 내었지요. 그런데 관가에서는 지금까지 차일피일 하면서 해결을 미루고 있습니다...

묘자리에 얽힌 송사

김삿갓 22 - 묘자리에 얽힌 송사 저는 바람처럼 거침없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살고 있지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김삿갓은 정색을하고 물었다. "주막에 주모도 없고 심부름 하는 머슴도 없는 모양인데 무슨 곡절이라도 있습니까?" "곡절은 무슨 곡절이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만사 모두가 귀찮아 잠시 문을 닫은 것 뿐입니다." "그래요 ?" 그러나 김삿갓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그는 묵묵히 밥을 모두 먹었다. " 잘 먹었습니다." 여인은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 단념한듯 상을 들고 나가려 한다. "잠깐만 ! " 김삿갓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제가 보기에 부인에게는 필시 절박한 일이 있으신듯 한데. 말씀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상을 다시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걸..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듯 우뚝 솟아있네

김삿갓(21)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듯 우뚝 솟아있네] ​'통천'에서 '안변'까지는 이백 오십리라 했다. 하루해가 또 저물었다. 어둠발이 내리기 시작할 때가 나그네에게는 제일 외로운 시간이다. ​김삿갓은 아무 집이나 들어설 양으로 조그만 마을로 들어갔다. 첫눈에 가난한 마을이라 생각되었다. 세상은 참 고르지 않다. 소슬대문에 하인까지 두고 거드름 피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겨우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헌데 김삿갓이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이 더 많고 인심을 쓰는데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들이 더 좋았다. 김삿갓은 오막살이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방안에서는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 호롱불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

윤진사 아버지 회갑잔치

김삿갓 20 - [윤진사 아버지 회갑잔치] 김삿갓은 외금강에 이르러 바다와 접한 금강산의 또 다른 풍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이제 계절은 중추(仲秋)로 접어들어 산중의 바람은 얇은 베옷을 헤집고 들어와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는 마침내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망망한 바다를 보니 막혔던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으면서도 시름은 파도를 타고 더욱 간절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외금강에서 함경도 땅으로 가는 길은 바다와 육지가 숨바꼭질을 하는 길이었다. 바다를 끼고 나란히 길을 걷다가도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다는 갑자기 먼 곳에 있었다. 이렇게 해금강이라 일컬어지는 외금강 을지나 북으로 발길을 계속하자 강원도 땅이 다하고 함경도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어선 큰 읍내는 통천(通川) 이었다. 통천은 바다를 ..

구름 따라 발길 따라

김삿갓 19 - [구름 따라 발길 따라] 立石峰(입석봉)을 떠난 김삿갓은 한동안 시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떠나오긴 했으나 막상 갈 곳을 정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짜증이 날 법도 하였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금강산이니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나가 바다 경치나 구경하자. 그 길로 북상하면 함경도 땅이 나오겠지" 내금강 곳곳을 돌아다니고 나니 어느새 구월 초순이 되었다. 산속에 가을은 빨리 와서 벌써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도 눈에 띄었다. 김삿갓은 먹고 자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골마다 암자요. 절이 있었다. 간간이 풍류를 즐기는 시객도 있어 그는 술에 목마르지 않았고 밥 한 술에 배고프지 않았다.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

입석암 노승과의 작별

김삿갓 18 - [立石岩 老僧과의 작별] 마지막 글자가 붓끝에서 떨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좌중의 시객들은 숨을 헉 하고 쉬었다. 순식간에 싯귀를 써내려가는 재주도 비상하였지만 화선지 위에서 용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서체며 그 글자들이 토해내고 있는 뜻들은 천하의 일품이었다. 장내는 시감에 몰입되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한 시객이 무릅을 치며 입을 열었다. "기가 막히군. 대체 이런 글이 단숨에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을 신호로 시객들이 다투어 김삿갓을 칭찬했다. 그중 한 사람이 김삿갓을 요모조모 뜯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선 혹시 입석암 빈승과 다투어 이겼다는 바로 그 김삿갓이 아니시오?" 김삿갓은 빙그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가 바로 김삿갓 올시다. 지금은 입석암 대사에..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도 박정해서, 봄날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김삿갓 17 -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도 박정해서, 봄날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대사님 , 갑자기 술 이야기는 어째서 하십니까?" 사실 술 생각이 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입석암을 훌쩍 떠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돌연 노승이 술 이야기를 꺼내자 마치 잊고 있었던 정든 여인의 이름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 갑자기 술 이야기를 거내 놓는지 노승의 마음이 궁금했다. "허허허 , 난 자네의 마음 속을 환히 알고 있네. 중이 되어가지고 자네에게 술 대접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마침 자네가 술을 실컷 마실 좋은 일이 생겼네." 김삿갓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입석봉 동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그럴듯한 절이 하나 있네. 내 지금 그 곁을 지나왔는데 천하에 내노라 ..

김삿갓의 고백

김삿갓 16 - [김삿갓의 고백] 노승과의 문답에 어느덧 밤이 깊었건만 두 사람의 부르고 쫒는 시 짓기는 그침이 없었다. 노승이 부르면 김삿갓이 즉석에서 받고, 삿갓이 받으면 노승이 이내 불렀다. 부르는데도 막힘이 없으려니와, 쫒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노승은 김삿갓의 뛰어난 실력에 내심 크게 탄복하였다. 이는 김삿갓도 다르지 않아 노승의 실력에 내심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 한다면 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것 같았다. "어허, 내 평생 가장 뛰어난 시재(诗才)를 만났구료. 더구나 젊은 나이에 이토록 무궁한 시상(诗想)을 가지고 있다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오." 노승이 이렇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소생 금일에야 시선(诗仙)을 만나 뵈온듯 합..